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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Mar 17. 2019

광화문,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靑春의 시작

Jon and Vangelis - Polonaise


    프로그래시브 락 그룹 예스 YES 출신으로 엄청난 미성의 소유자 존 앤더슨과 그리스 출신으로 아프로디테스 챠일드를 거쳐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거듭 난 반젤리스가 함께 한 음악, 폴로네이즈(Polonaise)를 듣고 있으면 나는 항상 1984년 봄의 광화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광화문 박지영 레코드에서 LP를 뒤적이고 있는 까까머리의 풋내 나는 두 녀석을 만나는 것이다.


청춘 靑春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내일이 불안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시절


    광화문에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 교회로 이어지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때, 그것을 청춘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의 청춘에도 광화문은 화석처럼 어엿이 자리 잡고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내일이 불안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시절." 청춘에 대한 나의 정의는 이렇듯 추상적이다. 이러한 나의 정의로는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관계로 네이버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네이버 가라사대 만물(萬物)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後半)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人生)의 젊은 나이 또는, 그 시절(時節)을 청춘이라 한다 했으니, 아무래도 나의 청춘은 고등학생 3년에 군대 3년, 그리고 대학 4년, 이렇게 십 년 상간을 그리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기에 나는 어떠했나 반추해 보면 한편으로는 치열하게 살았고, 한편으로는 나태했으며, 남들처럼 사회의 부조리에 격분하다가도 때로는 철저한 방관자가 되어 겉돌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삶의 무게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시기이기도 했고, 그런 만큼 삶의 무게를 너무 일찍 포기해 버린 시기이기도 했다. 청춘이 짊어져야 하는 삶에 무게에 대한 천착 또한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2016년 한국방문 중에 달리는 버스 안에서 촬영한 광화문

    특히나 나의 유년기와 사춘기, 그리고 청춘의 시기는 이사의 나날이었기에 스무 살에 떼어 본 주민등록등본에는 내 나이 보다도 많은 집주소가 기재되어 있었다. 그 많은 이사는 언제나 변두리에서 변두리로의 이사였고 내가 태어난 동교동에서 한 번도 중심부를 향해 더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 동교동에서 상계동, 상계동에서 개봉동, 다시 광명시(당시엔 광명리)에서 원당과 일산 사이에 위치한 가시골이란 작은 마을, 다시 신림동과 철산리. 이런 식이었다. 그 사이 광화문은 국민학교 2학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 원당가는 157번 버스를 기다리던 기억 속에 한 컷 남아있을 뿐다.


    하지만 나에게도 사대문 안의 추억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새우젓 배 들어오면 배 띄우고 노 저어야 한다는 마포에 한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이것이 원도심에 가장 가까이 진입한 케이스이자, 광화문을 비롯한 사대문 안과 주변 도심을 경험하는 단초가 되었다. 특히 광화문은 학교 근처였던 신촌이나 이대 앞 보다도 먼저 접한 청춘의 출항지였다.


    물론 광화문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형질에 접근했다는 뜻은 아니다. 별 볼일 없는 대부분의 민초 나부랭이가 그랬듯이 나에게도 광화문은 지정학적 거리뿐만 아니라 정서적 거리 또한 내 삶의 현장과 그리 가깝지는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광화문 光化門 박지영 레코드, 성욱이 그리고 폴로네이즈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


    이문세의 광화문연가가 덕수궁으로 해서 정동길로 이어지는 루트라면 나의 광화문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새문안로(신문로)를 따라 왼쪽으로 굽으며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는 길이다. 국제극장을 시작으로 덕수제과, 박지영 레코드, 웬디스, 서울고 자리(지금의 역사문화박물관) 그리고 건너편으로 경기여고, 숭문사, 비바 청춘을 따라 오르다 보면 덕수궁과 정동을 따라 거슬러 올라온 이문세의 광화문과 나의 그것은 MBC 체육관이 있는 정동 엠비씨(지금의 경향신문사) 앞에서 만나게 된다.

 

    여기를 지나면 사실 나의 사유 속에선 이 고개를 넘어 경교장이었던 고려병원(지금의 삼성 강북병원), 그리고 4.19 기념 도서관, 독립문, 영천시장 앞 서문 악기사까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그러다 보면 서로의 경계가 없어지고 서울이 모두 하나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새문안 고개를 넘어서는 이 동네는 김범룡의 '겨울비는 내리고'에서 만나보도록 하자.



    1984년 봄, 광화문 사거리에서 새문안 길을 바라보고 서면, 첫 번째 육교 오른쪽으로 덕수제과, 박지영 레코드가 있었고, 서울고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웬디스가 있었다. 이 중에 나의 기억 회로에서 첫 번째로 반응하는 광화문 관련 키워드는 '박지영 레코드'다. 사실 박지영 레코드보다 웬디스가 광화문에서의 첫 번째 경험이긴 하지만 내 기억의  사다리에서는 두 번째로 밀려있다. 그것은 친구 성욱이 때문이다.


    구로동의 한 구석진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강을 건너 마포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으니, 득실거리는 동네 토박이들이 사이에서 아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고등학교 생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같은 반에는 동병상련의 성욱이가 있었다. 성욱이 또한 학군이 다른 양정중학교를 나왔는데, 만리동 고개에 있던 양정고가 지금의 목동으로 이전하면서 떨궈졌단다. (양정고가 목동으로 이전한 건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의 일이니 정확히 말하면 이전하려고 해서 떨궈져 나왔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


    키는 나와 엇비슷했지만 체격이 다부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의젓함도 지녔다. 공부도 잘해서 전교생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입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라 온 배경이나 가정환경도 나와는 많이 달랐고 성격 또한 강해서 쉽게 범접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심지어 녀석은 공부뿐 아니라 운동좋아했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음악에도 취미가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삼신할매도 참으로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렸겠지만, 당시에 나는 그만 못 할 것도 꿀릴 것도 없다는 무대뽀 정신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성욱이와 나는 둘 만이 거의 붙어 다니는 단짝이 되었다.


    성욱이와 친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하철 2호선이 완전 개통되면서였다. 고등학교 입학 후 성욱이네 가족은 대림동으로 이사를 했고, 나는 광명시에 살았기  때문에 2호선 전철의 개통은 원거리 통학생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나의 경우, 이대 앞에서 버스 한 번으로 집에 갈  수는 있었으나 성욱이의 권유로 대림역 앞에 있는 독서실을 함께 끊으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대 지하철역의 긴 에스컬레이터를 똥가방*을 부여안은 채 계단에 주저앉아 시시덕거리며 내려가던 열일곱 살의 두 녀석의 모습이다.


*註) 우리는 중학교까지 옛날 교복을 입었고, 그 당시 들고 다니던 학생용 가방을 똥가방이라 불렀다. 성욱이와 나는 교복자율화가 된 그때까지 똥가방을 들고 다녔다.


    성욱이와 나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로 시작하는 전도서 성경 구절에 심취하여 외우기도 하고, 수채화 도구로 그림을 그리거나 하면서 항상 붙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성욱이는 방과 후에 광화문에 나가자고 했다사고 싶은 LP가 있어서 박지영 레코드엘 갈 거라고 했다. 녀석의 위시리스트가 바로 존 앤 반젤리스 (Jon and Vangelis)의 Private Collection 앨범이었다.  


    사장님께 LP를 요청하고 나서 성욱이는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노란색 표지의 LP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당시 클래식 앨범은 주로 노란색 쟈켓이 대부분이었고, 당시 우리는 지금의 바흐를 바하라고 불렀다.


"난 바하가 좋아. 세바스챤, 이름도 멋있어 보이구."


    클래식 애호가였던 '마녀'(음악 선생님)에게도 사랑받을 만큼 클래식에도 웬만큼의 조예도 있었던 성욱이가 물었다.


"넌 필요한 거 없어?"


    평소에 거침없었던 내가 머뭇거리자 녀석은 내가 LP를 고르지 않는지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녀석에게는 별로 의미 없는 질문에 그만큼의 의미 없는 반응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지 못했다.



음악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통로조차도 너무도 좁고 남루해서
턴테이블은 고사하고 그 흔한 워크맨 하나 있지 않았다. 


    음악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라디오 한 대 면 그 세계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었기에 그 어떤 자유를 위한 몸부림에 비해 음악은 경제적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통로조차도 너무도 좁고 남루해서 턴테이블은 고사하고 그 흔한 워크맨 하나 있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 후, 영어 성적이 현저히 떨어지자 어머니는 영어 공부하라며 광명시장 냉면집 주방장에게서 라디오 겸용 금성 카세트라디오 한 대를 중고로 얻어오셨다. 이 라디오 한 대가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우린,

턴테이블 없어."


    녀석과 나의 음악적 취향은 성격이나 가정환경만큼이나 달랐다. 내가 라디오에서나 흘러나오는 싸구려 롹이었다면, 성욱이는 있는 집 아이답게 클래식이었다. 그런데 그 둘 사이를 절묘하게 엮어 준 음악이 존 앤 반젤레스였다. 락계의 사이먼 앤 가펑클이 되겠다고 밝히며 데뷔한 전설적인 프로그래시브 락 밴드 예스에서 환상적인 보컬을 보여 준 존 앤더슨과 불의 전차, 1492 콜럼버스, 블레이드 런너 등의 영화음악의 거장의 반열에 오른 반젤리스 또한 레인 앤 티어스로 대표되는 아프로디테스 챠일드의 멤버였기에 클래식보다는 팝과 락 영역에 가까운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음악은 장르와 제약을 넘어서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스 시절의 존 앤더슨의 목소리가 궁금하다면 Yes의 Sweetness나 Wonderous Story를 번외로 추천해 본다.)


광명시장 냉면집 주방장에게서 중고로 구입한 금성 카세트라디오 TCR-553 


    물론 나는 이 곡을 한참 후에나 들어 볼 수 있었다. 요즘처럼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음악을 찾아 듣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시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턴테이블을 장만하고자 돈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자유 自由 

만약 누구든 내게서 자유의 본성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들은 이 곡에서 폴로네이즈라는 고전적 장르를 모티프로 삼아 자유를 향한 인간 본성에 대해 차분하고 조용한 선언을 노래한다. 이 곡을 듣다 보면 잔잔한 파도가 너울거리는 남태평양의 어디메쯤 노을 지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쪽배를 상상하게 된다. 이것은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이 갈구하는 그런 류의 자유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팔청춘 그 나이 대의 화두는 '자유'라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된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거친 의미보다는 부모나 지금까지 보호받던 존재에서 벗어나는, 그러니까 2차 성징기를 지나면서 울타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동물의 왕국적 정서에 가까울 듯하다.


    그리고 가끔은 특이하게도 그러한 일반적인 전형에서 벗어나는 녀석들을 만나게 되는데, 성욱이와 나도 그런 류에 속했던 것 같다. 하지만 녀석의 자유와 나의 그것은 달랐다. 부모 이전 세대부터 가진 게 많은 녀석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고, 그래서 녀석에게 자유는 더 갖지 못하는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반면에 가진 게 없는 나에게서는 좀 더 래디컬 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서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걸 굳이 풀어서 표현하자면 '선택의 자유'였다. 나에게서 자유의지는 절대적이었고, 그 의미는 선택이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삶의 굴레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맑스처럼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난 대학에 합격해도 빚쟁이들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라며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폴로네이즈는 그런 정서를 건드리는 딱 그런 노래였다. 자유와 해방이라 하면 롹캔롤이나 힙합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묘하게도 모든 것을 누그러뜨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순간을 느끼게 해 주는, 말하자면 폴로네이즈에는 해방감이 있다. 불만이나 방종이 아닌 원초적인 본성으로서의 자유와 평온을 느낄 수 있다.



Polonaise - Jon Anderson & Vangelis   [들어보기]


If you just take my sense of freedom
If you just take away my home
You can't ever hope to win me
This I'll tell you for sure
There is strength in the common people
For the people is all we really are
Young and old, the wisest and the lowly
Each indeed is 'Holy' in the 'Light of Love'
When the 'Word' comes
I will be waiting
Like a dove that shines he prays for peace
Some have waited what seems a lifetime
Some are waiting now to be released
For the moment we have this freedom
We will choose the way our hearts will move
All the people lost will find their way
Give that chance today
Hear and I will pray
No not for nothing hearts will not be broken
As long as we are open
Our hearts will make us free
Free for the Earth man
Free for the millions
In the 'Glory' all will come to 'Truth'
No aggression, that we leave behind us
To be replaced
By 'You'
For tomorrow another morning
For tomorrow another day
In our children there's that sense of freedom
Help them use it wisely
I will pray



만약에 당신이 나에게서 자유의 본성을 취하려 하거나

나의 안식을 빼앗아가 한다고 해도

당신은 결나에게서 그것들을 가져갈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강인함이 있습니다.

나이가 적든 많든 현명하든 그렇지 못하든

사랑의 빛 안에서 우리는 모두 성스럽습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자를 비추는 비둘기처럼

"말씀"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어떤 이는 평생을 바쳐 기다릴 것이고
어떤 이는 당장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의 이 순간

우린 우리의 마음이 향할 곳을 선택할 것입니다.

길 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길을 찾게 해 주시고

오늘 그 기회를 주십시오

나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고 있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유

"영광"안에서 모든 것은 

우리 뒤에 남겨놓은 분노가 아닌 

당신에 의해 채워질 

"진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내일의 또 다른 아침을 위해

내일의 또 다른 하루를 위해

우리의 아이들이 지닌 이 자유로움을

현명하게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전락(轉落)

그리고 누구에게는 또 다른 세계 


    수학여행 이후 내게는 좀 더 가깝게 지내는 윤상이라는 친구가 생겼다. 이 친구가 선술집 주모 같아서 이놈과 어울리다 보면 학교의 온갖 잡놈들은 다 만나게 될 정도였다. 더욱이 가정환경은 물론 음악을 비롯한 공감각적 정서가 많이 비슷하여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수학에 자신이 있었던 성욱이는 이과를 선택하고 반면에 인문학적 정서가 넘쳤던(?) 나는 문과를 선택하면서 다시는 같은 반이 될 수 없었다. 반면에 문과를 택한 윤상이와는 계속 같은 반이 유지되면서 교류가 이어졌다. 결국 윤상이와 나는 교내 롹밴드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성욱이와는 이상하리만치 거리가 멀어졌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고3이 되어서는 거의 서로의 존재 자체를 잊고 지낼 정도였다. 나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원만하게 생활했지만 성욱이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녀석이 구축한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잘난 놈이니까, 강한 놈이니까 그 안에서 자유로우면 됐지, 하며 잊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놈은 강해지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응어리진 자유에의 천착은 녀석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성격이 괴팍해지기 시작했다고 했고, 갈수록 외톨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녀석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녀석과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형성된 새로운 환경에 편입되어 그 세계에 완전히 젖어들고 있었다. 학력고사 후, 진학 상담을 위해 담임과 면담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침 그 또한 상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성욱이를 학교 후문에서 만났고, 이것이 성욱이와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때 녀석과의 대화는 이랬다. '고려대로 가려면 34번 버스를 타야 해. 34-1번은 돈암동으로 가더라고'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은 도피성 해외유학을 갔다느니, 미국에서 정신병이 생겨서 몹쓰게 되었다느니, 아니다, 고대 수학과에 들어가서 잘 다녔다느니 그나마 소문도 그때뿐일 뿐, 시간이 지나면서 그마저도 스러져 버렸다.


    존 앤 반젤리스의 폴로네이즈를 다시 들으며 그 시절의 광화문과 그 시절의 까까머리 두 녀석을 다시 만난다. 새로운 세계로의 편입과 새로운 발돋움의 순간들을 함께하며 한편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각을 가다듬던 그때, 만약 누구든 내게서 자유의 감성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호기 부리던 까까머리 고등학생 두 놈. 나의 청춘은 그렇게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녀석의 근황이 궁금하지 않다. 내 인생의 노트에서 한 페이지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녀석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멀리 날아갔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변두리에서 나처럼 웅크리고 있다면 녀석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녀석의 용서를 받을 만큼 살고 있는 걸까? (終)





음악은 이미지다. 음악은 단순히 소리 뿐만 아니라 공감각적 형태의 소스로 저장되었다가 재생될 때 다시 그 공감각적 형태로 기억을 소환한다. 우리는 이름하여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고, 나에게 추억은 음악을 틀면 활성화되는 이미지 파일들로 저장되어 있다. '그 남자의 음악다방'에서는 음악에 얽힌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추억의 이미지를 통해 소시민적 삶의 단면을 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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