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여름가을겨울 - 영원에 대하여
故 전태관 님의 부고를 접하고
그를 추억하며 급하게 글을 올립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당시에 신촌에 가면 신촌블루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들극화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들이 퍼져있던 시절이었다. 크리스탈 백화점 소극장 공연장을 중심으로 이들의 공연은 끊이지 않았고, 故 김현식의 백밴드였던 봄여름가을겨울은 기타리스트 김종진과 드러머 전태관을 중심으로 새롭게 팀을 꾸렸다.
故 전태관은 서강대학교 킨젝스 출신이다. 나의 고등학교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강대와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강대를 00 고등학교 부속 대학교라고 부를 만큼 친근했고, 서강대가 벌이는 데모는 우리의 단축수업이었고, 그들의 축제는 우리의 놀이터였다.(물론 이대축제를 더 선호하긴 했지만) 서강대 축제에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킨젝스의 공연이었다. 대학가요제나 그런 대중매체에서 성공적으로 이름을 알릴 기회가 없었기에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킨젝스는 항공대의 런웨이, 홍익대의 블랙테트라, 연대의 라이너스, 건대의 옥슨처럼 서강대를 대표하는 밴드였다.
봄여름가을겨울 혹은 전태관이나 김종진의 필모그래피를 나열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그의 선한 인상과 출신학교에 대한 친밀감, 그리고 그의 음악적 열성과 성과 등으로 인해 나에겐 개인적인 영역에서 매우 인상적이며 우호적인 뮤지션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의 아내가 매우 좋아하는 뮤지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애기간이 매우 짧았던 우리에게 결혼하기 전 유일하게 관람한 콘서트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브라보 마이 라이프였고, 마지막으로 그를 본 건, 발병하기 직전 영등포의 한 합주실에서였다. 그때 나는 연예인의 사인을 받는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태관의 사인을 받아 아내에게 바쳤었고, 아내는 아직도 매우 중요한 서류들과 함께 깊이 보관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이대 앞에서 카페를 차린 친구가 있었다. 가게의 이름은 e.g.o(이.지.오)라고 했고, 이대 정문에서 연대 굴다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신촌 기차역 못 미쳐 오른쪽 지하에 있었던 20평 남짓한 카페였다. 가게 작명에도 깊게 관여했던 나로서는 애정이 상당히 많았다. 무엇보다도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이었고, 졸업 후 취직할 때까지 나의 여가를 책임져주던 유일한 해방구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가게에는 전 주인에게서 인수한 LP가 이백여 장 있었고, 까페 영업에 있어서 음악의 중요성에 대해 완전 문외한인 주인이자 친구를 대신해서 끊이지 않게 LP를 트는 일이 나의 주 임무였다. 그런 연유로 대부분의 시간은 CD을 올려놓은 채로 영업을 했지만, 내가 있는 경우엔 주로 LP를 틀게 되었다. 제한된 LP량 등 물리적 한계로 인해 신청곡을 받을 수는 없었기에, 그저 내가 틀고 싶은 곡들만 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때 내가 가장 많이 틀었던 곡 중에 하나가 봄여름가을겨울의 '영원에 대하여'일 것이다. 사실 이 곡이 나에게 주는 특별한 인상은 없었다. 특별할 것 없는 곡 구조에 찌질한 정도는 아니지만 왠지 넋두리조의 가사, 아무리 조숙하다고 해도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에게 어필될 만한 곡은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에 나는 영원을 염원하지도, 그런 꿈도 꾸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며 실리적인 청년이었다. 어쩌면 영원에 대하여가 수록된 4집 앨범이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지 못 한 이유도 있을지 모르겠다.
봄여름가을겨울
늦은 밤 창가에 앉아 지난날 떠오르면
어느새 나는 그대의 길을 떠난다
어두운 밤길을 지나 그대의 창에 서면
저 멀리 떠오르는 추억의 별빛들
어두운 밤하늘 아래 그대와 단둘이서
영원을 얘기하며 이 길을 걸었지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영원을 향해가고
사랑은 맴돌지만 멈추지 않는 법
그 누가 나의 가슴을 따스이 어루만지리오
짧고 달콤한 꿈 속에서 보는 그대여
시간이 흐른다 해도 잊었다 말하지 마오
그 말속에 우리 약속이 날아갈까 하오
그대여 외롭다 해도 눈물은 흘리지 마오
눈물 속에 그리움이 씻겨갈까 하오
어쨌거나 봄여름가을겨울에게는 거리의 악사,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 어떤이의 꿈, 십 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 아웃사이더, 열일곱 스물넷 등속의 수많은 히트곡이 있지만, 내게는 영원에 대하여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이 노래에는 이대 앞 지하 카페에서 웅크리고 있는 한 젊은이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진학과 취업의 사이에서 몇 번의 취업 낙방에 씁쓸해하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몸으로 부딪치며 깨치고 있던 그 젊은이 말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이유에서건 영원에 대해 얘기하게 된다. 마치 영원할 것 같은 시간들, 영원하길 바라는 사랑 또는 우정. 이런 부질없는 소망들은 어쩌면 영원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고픈 욕망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영원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런 역설은 어떨까 싶다. 만약 시간이 영원하다면, 유한 존재로서의 나의 모든 기억과 바람들은 나의 유한함이 끝남과 동시에 무한해지게 되므로 영원함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그래서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도 故 전태관의 드럼 비트도 나와 함께, 시대와 함께 영원히 무한하게 되리라는 그런 상상.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바라며,
이생에서 함께 했던 故 김현식, 故 유재하와 함께 그곳에서도 여전히 음악과 함께 하시길...
음악은 이미지다. 음악은 단순히 소리 뿐만 아니라 공감각적 형태의 소스로 저장되었다가 재생될 때 다시 그 공감각적 형태로 기억을 소환한다. 우리는 이름하여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고, 나에게 추억은 음악을 틀면 활성화되는 이미지 파일들로 저장되어 있다. '그 남자의 음악다방'에서는 음악에 얽힌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추억의 이미지를 통해 소시민적 삶의 단면을 담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