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쓸 병에 걸려버린 내가 우습고, 안쓰러워서.
마음껏 기뻐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병.
오랜 기다림을 견뎌낸 네가 드디어 경기에 나설 때. 타석에서 보기 좋게 안타를 때려내거나, 마운드에서 만만치 않은 상대를 잡아내거나, 그라운드로 날아든 공을 기민한 움직임으로 처리해 낼 때. 또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볍지도 않은 너의 모습으로. 네가 그토록 땀과 피를 토해가며 나에게 전해주던 온전한 너만의 플레이를 펼쳐낼 때. 그것으로 팀을 위기에서 구하거나, 나아가 팀을 승리로까지 견인할 때. 그렇게 그라운드 위 모두에게, 아니 그라운드 밖에까지도 네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보란 듯 증명해 낼 때.
우리의 작은 세상이 온통 너를 향한 환호성으로 가득 찰 때, 내 마음은 포효하며 하늘을 날았지. 그럼에도 어금니를 굳게 깨물거나,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거나,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게 고작인 나는. 하물며 네 앞에서는,
어땠어?
이제 너는 뭘 할 거야?
라고 물어보는 게 전부였던 나는. 그랬나봐, 마음껏 기뻐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병에 걸렸나 봐.
마음껏 아파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병.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엔트리에서 너의 이름을 찾지 못할 때. 이제 한, 두 타석을 섰을 뿐인데, 겨우 공 몇 개 던졌을 뿐인데 교체되고 말 때. 네가 토해 낸 피땀눈물에는 턱없이 모자란, 그래서 더욱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절체절명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을 때. 그마저의 기회조차 쉬이 주어지지 않을 때. 타석에서, 마운드에서, 고개를 떨군 네가 혹은 실망하고, 체념하고, 성난 관중석(행여 덕아웃이라면 그건 재앙에 가까울 테고)이 세상 전부라고 느껴질 때. 그리고 어김없이 칼바람이 불어닥칠 때.
나도 모르게 혀 끝을 넘실대는 욕지거리에 박자를 맞추듯 콧구멍은 벌렁이고, 하늘에 계신 분을 탓하며 세상 끝낸 허무주의에 빠지다가도. 기껏 한다는 짓이 한숨조차 마음껏 내쉬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게 고작인 나는. 하물며 네 앞에서도,
어땠어?
이제 너는 뭘 할 거야?
라며 태연한 척 질문만 던져대는 나는. 그래, 아마도 마음껏 아파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병에 걸렸나 봐.
너에겐 그 모든 감정들이 곧 그만큼이나 건강하단 반증이라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건강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꼴이라니. 나는 어쩌다 이런 몹쓸 병에 걸려버린 걸까.
결과 그리고 과정.
우리는 어디쯤 있는 걸까?
결과냐, 과정이냐. 중요도를 따져 순위를 매기라는 것은 억지다. 만약 숨도 쉬지 않고 결과(혹은 과정)를 가장 위에 놓을 사람이 있다면, 나와는 일찌감치 자리 펴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기는 글렀다. 그만큼 개인적으로는 이런 햄릿 논쟁이 재미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지금은 내가 결과와 과정 중, 어디에 있을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다 결국 놓쳐버린 것들, 그리고 그것을 놓침으로 인해 걸려버린 몹쓸 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내가 놓친 것은 다름 아닌,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 다채로운 감정이들로 채워진 너와 나의 마음이다.
코칭에서는 결과, 과정 모두를 중요한 테마로 다룬다. 물론, 프로팀에 적을 둔 후로는 결과의 의미가 더 커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결과를 완전히 배제한 코칭을 하는데, 특히 훈련이나 시합 현장에서 진행되는 코칭에서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 빈도수를 높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결과가 선수의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한다. 결과로 인해 울고 웃는 것은 경기가 끝나고도 충분하다. 하루는 생각보다 길다.
선수가 자기 최고의 공을 던질 수는 있지만, 그 공이 반드시 '아웃'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선수가 최고의 스윙을 할 순 있지만, 그 스윙이 반드시 '히트'로 이어지진 않는다. 선수가 최고의 기량을 펼칠 순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승리'를 가져다 주진 않는다.
어떤 종목인들 다를까. 승부를 겨루는 모든 스포츠가 그러하다. 최고의 플레이와 최고의 결과 사이에 등호(=)는 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선수에게 주문하는 '플레이에 집중하라'는 과제는 플레이의 결과가 아닌 어떤 플레이를 했고, 어떤 플레이를 할 것이냐에 포커스를 맞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잘 모르겠어요. 똑같이 했는데, 안 돼요.
그러한 연유로 플레이를 마친 선수에게 내가 반드시 던지는 질문은, '방금 플레이가 자기다웠는가'이다. 여기서 이 질문에 진실된 대답을 할 수 있으려면 그 전 훈련(준비)과정에서 자기다운 플레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치열한 검열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다운 플레이를 확립했다 할지언정, 안타깝게도 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방금 나의 플레이를 디테일하게 곱씹기 불편해한다. 그 플레이가 안 좋은 결과를 불러왔다면 특히나 더더욱. 해서 나는 '잘 모르겠어요', '똑같이 했는데...' 와 같은 류의 대답을 믿지 않는다. 절대 똑같지 않다.
애초에 그 복잡한 인체의 행위가 매번 똑같을 수 없을 뿐더러, 설령 네 말마따나 정말 똑같았다면 네가 그렇게 고개 숙일 리 없다. 오히려 너는 그 길이 아님을 발견한 것에 대해 기쁨과 후련함을 더 크게 느낄 것이었다. 해서 만약 정말 자기다운 플레이였다면, 결과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너는 분명 다른 대답을 내놨을 것이다. 어떤 대답일지 내가 감히 짐작할 순 없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빨리 다시 플레이하고 싶어요! 그리고 웃기. 모두가 분노한 은메달을 목에 걸고도, 금빛보다 환하게 은반 위에 당당히 서 있던 그녀처럼. 처절한 패배 후에도 상대에게 승리의 존경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옥타곤에서 홀가분히 미소 지은 그처럼.
내가 아는 너 역시 그 어떤 아쉬운 결과를 받아 들고서도 웃을 줄 아는 선수였고. 단지, 상대가 더 잘했을 뿐이라며 자유롭고 떳떳하게 말하던 선수였으니까. 그런 널 보면서 진짜 나다운 플레이는 결과를 압도한다는 걸, 진짜 '너'다운 플레이는 너를 계속해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가슴아린 패배 속에서도 '나'다운 플레이를 펼쳐낸 너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네 안에 살고 있을까. 잘은 몰라도 그때의 결과가 결코 그 자리에 멈추게 하진 못했으리라. 결국 내가 믿는 것은 어떤 결과도 우리의 플레이를 폄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모든 플레이는 그 자체로 존귀하다. 왜냐하면 그 플레이의 주인이 존귀하다.
설명이 꽤 길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러한 연유로 어떤 결과에도 '너'를 물어보고자 했고, 여기까지는 좋았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멘탈코치 같았다.
자, 그러면. 여기부터 문제.
당연히 나도 결과가 아닌 자신의 플레이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거겠지?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지? 이 잘난 멘탈코치여.
우습고도 안쓰러운 일은 결과-과정의 저울질에만 빠져 정작 중요한 곧, ‘진짜 우리’는 마음(그것도 살아 요동치는) 안에 살고 있음을 놓쳤다는 사실이다.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봤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마운드에서 두들겨 맞고, 타석에서 방망이가 수없이 헛돌고, 날아오는 공에 글러브가 움츠러도. 몇 번이고 다시 공을 쥐고, 글러브를 끼고, 배트를 집어 들며 심호흡과 함께 또 한 번 그라운드에 오르는 너에게. 나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제발. 아웃 하나만. 제발. 안타 하나만. 제발. 제발. 너만 잘해라.
어떤 결과라도 만들어내기 위한 그토록 처절하고, 위대한 플레이 앞에서 나는 매번 이따위 짓거리나 하고 있다. 두 손, 땀 한가득 모아 안절부절 결과만을 기도하면서. 혹시라도 실패할까 지켜보는 것조차 두려워, 애꿎은 화면을 껐다 켜기를 반복하며 속으로 이렇게 지껄인다.
아, 도저히 못 보겠다. 이건 못할 짓이야!
슬슬 마무리.
나는 결과나 과정의 그 어디쯤이 아니라, 진짜 너와 나를 만날 수 있는 마음에 먼저 있어야 했다.
번지르르하게 말만 떠들어 놓고, 정작 나는 달콤한 감정만을 원하며, 마음의 건강함을 잃었다. 그럴듯하게 어설픈 논리를 세워놓고는 그 안에 갇혀, 나부터가 나다운 플레이를 놓쳤다. 내가 가장 원하는 코칭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확실한 결과도, 이면의 가치를 추구하고 의미를 채워가는 과정도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코칭은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사람인지를 우리가 스스로 느끼며, 매순간 기분 좋은 마음을 갖는 것이다. 나는 결과나 과정에 있을 것이 아니라, 너의 그리고 나의 마음에 있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불치병은 아니었다. 왜일까, 팀을 나와서는 너와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조금은 더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하니 어떤 너는 이런 내가 더 좋고, 편안하다고 말했다. 함께 마음껏 기뻐하고, 함께 마음껏 슬퍼하니 너는 더 빨리 너다움을 되찾고. 나는 좀 더 건강해졌다.
예전의 나는 모든 감정을 너와 온전히 함께하지 못했다. 나는 너와 감정을 함께 하기보다, 그것들에 앞서서 너에게 지겹도록 던지고 또 던졌다. 그래서 이제 너는 뭘 하려고 해? 내가 너에게 던지는 질문은 마음의 상태와 상관없이 똑같았다. 억지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갑갑하고 답답해 죽겠어.
이제는 경기에서 패배하고, 터무니없는 실수를 범하거나 너무나 좋은 찬스를 허무하게 날려버렸을 때, 나는 너와 함께 좌절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실망한다. 경기에서 승리하고, 노력만큼의 플레이를 해내거나 기어이 너에게 다가온 기회를 강력히 붙들었을 때, 너와 나는 함께 환호하고, 기뻐하고, 미소 짓는다. 그래야만 비로소 나는 너에게 질문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다음 페이지의 너에 대해서.
딱히 더 할 말도 없을뿐더러, 오늘은 조금 많이 부끄러우니. 여기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