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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다쟁이 May 09. 2024

아포리아 현대

이 다음이 보이지 않는 현상이 대한민국에 국한된 것이라 생각했다. 출산율의 저하, 성장 전략의 부재, 갈수록 심화되기만 하는 양극화까지 우리의 특징적 질서라 단언했다. 그러나, 최근 알게 되는 데이터는 이런 현상이 비단 우리만의 일이 아님을, 선진국 모두의 현상임을 알게 해준다.


우리의 빛나는 별이었던 유럽이 그 빛을 잃어간다. 유럽 전반 역시 생산성 약화, 디지털 혁명에서의 도태, 이민자로 인한 막대한 사회적 비용 등 다수의 문제를 앓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으나, 현상변경과 전파 속도가 개인적인 예상을 아득히 상회한다. 언제나 우리의 정답이었던 그들은 이제, 우리랑 같은 문턱에서 칠흙같은 어둠을 마주하는 중이다.


어쩌면 유럽의 각 국은 우리보다 더욱 어려울지도 모른다. 전통적 산업인 금융과 제약 일부 제조업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으나, 현대 산업의 핵심인 반도체는 물론 디지털 영역에서 유럽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미 그들은 디지털 분야에 있어 완전한 변방국인, 종속자일 뿐이다. 오죽하면 마크롱이 ‘유럽 절멸 위기’라는 표현을 써가며 강조했을까.


The Economist. May 2nd 2024




미국의 독주 역시 그 내용을 보면 우리의 모범이 되지 못한다. 혹자는 미국의 마약문제를 중국의 초한전(Unrestricted Warfare)의 일부라고 생각하기도 하나,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도 미국이 현재 병들었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미국의 장점이던 용광로적 문화와 엘리트 정치는 그 힘을 잃은지 오래며, 빛나는 경제 성장 뒤에는 그 혜택을 못받는 수많은 빈민들이 존재한다. 외형상의 성장이 실질적 성장을 보장하지 못하고 천정부지로 상승하는 물가는 개인들의 숨을 조금씩 조르고 있다.


미국과 유럽, 우리의 목표 지향점이었던 두 국가 모두 일정부분 우리와 유사한 ‘아포리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갈등, 출산율 하락, 성장 전략의 부재, 심화되는 양극화에서 그들 역시 그 다음 스텝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우리의 노력도 있지만, 거대한 역사적 흐름과 국제 전략의 일환으로 관찰할 필요도 있다. 서구권이 경제 성장 한계에 직면 했을 때, 그들은 자본 효율성을 높여 새로운 이익 창출구 즉, 알파를 찾아 헤맸다.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일본의 옆동네, 높은 근면성으로 언제나 기대 이상을 보여주던 국가에게 자본이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즉, 당시의 경제 성장 한계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로 돌파했다는 것이다. 과거에 식민지들과, 미국을 통해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현재는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 등이 새로운 투자처로 촉망 받고있다. 골드만삭스는 2050년에 이들 국가가 우리나라를 추월할 것이라고 까지 전망했다. 그들의 막대한 정보와 통찰력, 혜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현재의 흐름을 고려하면 어려운 미래가 아닐까 전망한다.


Source by Investland Bali




현대 산업의 큰 축은 AI와 전기차 반도체라는 세가지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가지 모두 디지털이 결부된 사항이라는 것과 함께 우리의 ‘인프라’를 근본부터 바꾸는 영역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기차는 우리의 운송수단에 대한 인프라를, AI는 인터넷이라는 정보 혁명적 인프라를, 반도체는 이를 포함한 통신 등 기초적인 수준의 인프라 전부를 규율한다.


이 세가지 산업 축은 과거의 조선, 내연기관 자동차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의 기술 개발 난이도와 산업적, 기술적 집적이 필요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미국에게 철도와 철강이, 우리나라에게 자동차와 조선업이 선사했던 소위 ‘추월차선’을 현대에는 개발도상국이 감히 시도하기 어려워지는 형국이란 것이다.


그럼 결국 현대 산업의 핵심인 테크산업의 주도권은 계속, 미국의 압도적 우위 아래서 중국이라는 독자체제, 한국과 일본이라는 하나의 소규모 지역특색인 3개의 축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즉,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이 묘사하는 AI 천하삼분지계가 어느정도는 예견된 미래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미국과 유럽은 기술이전 및 자본투자를 통해 싼 값에 공산품을 제작해 수입했다. 이를 통해 물가 안정은 물론 내수 시장 확대를 도모 했으며 자본투자로 얻어진 자본을 또 다시 자국의 기술 개발 및 새로운 자본 투자로 연결시킨 골디락스 경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미래의 산업이 천하삼분지계로 귀결된다면, 선진국의 자본은 해외가 아닌 국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목도하는 미국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선진국에는 이미 자체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다. 디지털 산업의 고용규모는 일반 제조업에 비해서도 적다. 자본이 국내에 머문다고 해도 그로 인한 성장 및 고용이 유발되는 것이 아닌, 물가 및 이자율만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이로인해 고착화 된 경제적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우리네 삶은 더욱 팍팍할 지도 모르겠다. 경제는 성장하지만, 개인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그런 상황의 지속 말이다.




개인적으로 한동안 1873년부터 1896년까지 이어진 대불황(Long Depression)에 천착했다. 기술의 발전과 수요의 부진에 따른 장기 디플레이션 현상이 현대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결론적으로 현대 국가는 물가 하락보단 과도한 인플레이션 상승에 애를 먹고 있지만, 대불황과 현재 경제는 그 핵심이 유사하다 본다. 바로, 기술 발전에 따른 고용없는 성장과 국제 질서의 변화가 그것이다.


대불황의 결과는 역사에서 드러나듯 세계대전과 파시즘으로 귀결되었다. 이런 결과는 각 국이 벽을 쌓고 본인들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 것에 기인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행동을 이미 목도하는 중이다. 트럼피즘(Trumpism)은 더 이상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다. 트럼프가 2016년 대선 당시 공들였던 러스트벨트에 대한 정책과 이민자에 대한 강경한 태도는 정파를 넘어 미국 정치권의 기본적인 태도가 된지 오래다. 미국 중심주의는 바이든 정부에 이르러 세련미를 더했을 뿐, IRA(Inflation Reduction Act)로 계승되었다. 유럽은 CRMA(Critical Raw Materials Act), 핵심원자재법을 통해 생산시설의 역외 이전을 최대한 규제하고자 노력 중이다. 개방화와 세계화를 이끌던 국가들이 점차 폐쇄적인 국제 경제체제를 지향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Source by Bankunderground




이런 흐름에서 미국의 국제 질서 현상 유지능력은 이미 종말을 고하는 중이다. 더 이상 미국은 독보적 행위자로 기능하기 어렵다. 인도 - 태평양 전략을 비롯하여 미국이 공들이고 있는 CHIP4, QUAD, AUKUS는 미국이 이미 역량의 한계에 직면한 것이라는 방증이다. 이는 곧, 국제질서가 점차 변화하고 있고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불황 시기 영국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에겐 마땅한 대체재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저물어가는 해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해가 있어야 하는데, 미국이 저물어가는 해인지도 떠오르는 해가 있는지도 명확치 않다. 이 흐름에서 유럽과 중국, 러시아는 서로 떠오르는 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공허한 주장처럼 들린다.


분명, 세계사적 전환기에 진입했지만 그 다음 페이지가 어디로 향할지 세계 지도자들도 제시하지 못한다.




‘아포리아’는 그리스어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난제와 모순을 의미한다. 소위 막다른 골목을 생각하면 된다. 수많은 신문의 사설들은 아포리아를 인용하며 대한민국의 문제를 비유했다. 개인적으로도 언젠가부터는 우리나라의 문제는 너무나 얽히고 설켜서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 탄식해 왔다. 이에 어쩌면 해외 선진국들을 관찰하며 우리의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 선진국들 조차 우리와 같은 선상에 서있다. 답이 보이지 않는 아포리아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현재 인류 문명을 이끌어 가고 있는 국가들 모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AI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 문명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돌파구가 생성될지도 모른다. 막대한 연산 능력 덕분에 가능한 생명공학의 발전이나, 개화하기 시작한 우주 물류시장의 기술 개발 속도 상승, 새로운 소재의 합성 등 AI가 발전하면 가능할 것이란 정서가 점차 형성되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도  AI를 통해 기술 발전이 더욱 가속되면 경제성장 및 새로운 시스템 구축이 가능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정서를 선사할지도, 희망이란 단어 앞에서 현대의 문제는 모두 자연스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조금 갖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가정세계의 영역이다. 어디에서도 우리의 나아갈 길을, 가능한 길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역사 속 결과를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새로운 길이 어디에 있을지 이제는 모두가 모여 속 터놓고 함께 논의해야만 하지 않을까.



끝.


p.s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의 결말이 아포리아적이라 생각해 대표 이미지로 삼았다. 그러나 혹자는 아주 간단한 것이 답이라는 것임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을 고민하는 것을 코엔 형제 특유의 방식으로 말하는 영화라고도 한다. 우리의 문제는 어느쪽에 가까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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