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우러러보아요, 이게 내 사랑이에요

넌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하나 봐

by 주또

어제는 약속이 취소되어 집에서 뒹굴다가 저녁 여섯시쯤 잠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오늘 아침 아홉시가 훌쩍 넘는 시간에서야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 아주 오랜 잠이었다. 중간에 한번 깨기도 했다만 그리 길지 않았다. 곧장 다시금 잠 속으로 빠져들었고 웬일로 악몽도 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꿈속에서는 당신이 묵언했다. 철저히 묵언한 상태로 고상한 얼굴을 내게 비추었다. 현실에 있는 사건이 반영된 꿈이었다. 현실에서도 당신은 그 도도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마주한 듯 아닌듯한 눈동자로, 미련 없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연이 말했다. 넌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하나 봐. 순간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띵, 했다. 그동안 내 취향은 무얼까. 수없이 고민해왔는데 비로소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이라.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나보다 큰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범접할 수 없는 거리에 있는 사람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당최 기쁜 일이 아녔다. 좋아하게 된 순간부터 울상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한다. 좋아해서, 그런데 좋아해도 되나? 줄줄이 이어지는 질문들이 내 온몸에 똬리를 틀었다.


안된다고 하면 또 어쩔 건가. 좋아하면 안 된다고 해서 금방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단향에 매혹되어 마셔서는 안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어서 또 한 모금 마셨다. 시초가 잘못됐다. 그렇게 몇 모금 꼴깍하고 나니 마시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손이 가고 어느덧 취한 탓인지 판단력이 흐릿해졌다. 이 사람을 보아도 당신 같고 저 사람을 보아도 당신을 떠올려내고. 어쩌면 뒤에서 당신을 찬양하는 난, 누구 보기엔 영락없는 주정뱅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하염없이 슬펐다.


당신을 불렀던 날을 꺼내봤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당신을 부르고서 머리 위로 손을 흔들었을 때 당신은 똑같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한참이나 잊히지 않고서 또렷하다. 당신은 아마 거리감이 꽤 있어 손을 흔드는 것이 나였는지 누구였는지 분간해 내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별안간 당신을 도로 마주하기도 했다. 쭈뼛거리며 다가가 당신을 재차 불렀고 당신이 뒤를 돌았다. 뒤를 도는 시간이 고작 몇 초임에도 불구하고 천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얼굴이 앞으로 내가 보게 될 세상의 전부 같았다.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도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도 어느 것 하나 쉬이 흐려지지 않을 완벽한 장면다웠다.


이 일에 앞서 당신과 대면한 일이 몇 가지 더 있다. 비록 단편영화 한편 채 나오지 않을 분량이다만, 내가 제일 낮아지고 있던 시점 당신이 등장해 웃어주었고 얼마 안 가 대각선에 앉아 밥을 먹게 된 적이 있었으며 동그랗게 선 무리 가운데 당신 옆에 서게 되었고 눈동자가 맞닿자 웃어주었던 찰나. 지나치던 당신을 붙잡아 칭찬을 하자 아주 큰소리로 웃어주어 되려 내가 더 민망했던 일들. 한없이 무뚝뚝해 보였던 당신의 반달 눈웃음을 처음 보게 되었을 적 직감했다. 당신이 나로 하여금 많은 양의 눈물을 뽑아내리란 것을.


당신은 지난 내 사랑을 잊게 했다. 당신은 나를 기다리도록 만들었다.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모레.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건 무관심의 의미였을까. 이로부터 청춘의 색이 바뀌었다. 당신이 오지 않았고 내게 답장을 주지 않은 날로부터 다채로움은 빛을 잃고 차츰 회색에 잠식되었다. 낭만도 뭣도 없었다.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사랑 방식이었다. 누군가 마음에 들어올 경우 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도록 모조리 내어주는 것.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점차 기력이 없었다. 누워만 있고 싶었다. 차라리 질리도록 당신 생각만 하다가 꿈에서라도 마주하는 편이 나았다. 세상을 통째로 내어주든 간에 바꿀 수 있는 점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현실이 나를 무력하게 굴었다.


우러러보다. 위를 향하여 쳐다보다. 마음속으로 공경하여 떠받들다.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으로 태어났어야 했다. 설혹 그것이 불가능이었더라면 이토록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인간 축에 끼면 안 되는 거였다.


당신을 우러러보아요.

올려다보는 고개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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