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는 말랑한 걸로 주세요

오랜만에 만났던 이에게서 들었던 말이 여태 생생해 간지러웠다.

by 주또

- 네가 가진 생각이라는 거, 그게 되게 무서우면 어쩌지.

전하려다가 말았던 문장을 다시금 곱씹었다. 껌을 씹듯 머릿속으로 여러 번 되뇌고 보면은, 어쩌면 하지 않기를 잘한듯하다고 판단이 서는 말마디들이 있다. 덧붙여 괜히 해버렸다, 싶은 말들도 있고. 딱딱한 복숭아는 싫어했다. 말랑한 복숭아만 꼭 골라 먹었다. 말랑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중간쯤 되는 복숭아도 별로였다. 씹다가 맹해진 표정으로 ‘내 취향이 아니다’ 선언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대개 말랑하고 부드러운 것들을 좋아했다. 참외나 멜론, 사과, 이런 류의 씹는 감 있는 과일들은 멀리했다. 바나나, 오렌지, 파인애플, 포도 등등. 달짝지근한 맛을 좋아하는 거라 해야 하나. 여하튼 간에. 인간관계 또한 얼추 비스름했다. 당연한 소리이긴 하다만 너무 딱딱하고 다가가기 어려울 경우 거리를 뒀다. 지내다보며 쌓아온 데이터 기반으로 나와 맞지 않을 거란 판단이 어느 정도 명확해질 시에 차츰 거리를 뒀다(가끔 오류가 있긴 했다). 반대로 나와 비슷한 결의 인물들은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이성적인 사람, 감성적인 사람,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품고 있는 고유의 결이라고나 할까. 말랑하고 부드러운 인간들. 겉과 속이 같을 수도 있고. 겉은 딱딱해 보여도 속내가 다를 수도 있고 그런. 무슨 느낌인지 대충 알지 않으려나.


푹푹 찌는 거리를 지나 비로소 들어선 지하철. 에어컨 바람이 굉장히 셌다. 차갑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동행자는 핸드폰을 마이크처럼 입가에 댄 채 질문을 던졌다. 30대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 심정이 어떻냐는 내용이었다. 골똘히 고민해 볼 필요도 없이 즉각 대답했다. “얼른 서른이 되고 싶기도 해요. 빨리 나이를 먹고프기도 해서요. 왜냐, 좀 더 어른이 되면 많은 것들에 의연해지지 않을까 싶은 것도 있고, 20대가 너무 난장판이었거든요. 보기와 다르게 극복의 연속이었고요. 그래서 얼른 30대로 넘어가버리고 싶어요. 과거와도 멀어지고 싶고.”


사계절 중 여름이 가장 길게 느껴지는 편이었다. 더위를 극심하게 탔던 까닭이었을 테다. 여름엔 여름이 지나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여름이 넘어가면 여름이 오지 않기를 소원했다. 남들은 여름이 청춘과 걸맞은 계절이라 한다만, 난 다 익어서 뭉개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여름엔 즐길 거리들이 다양하다는 얘기도 공감 못했다. 난 햇빛을 피해 저녁에서야 겨우 나오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은 더위를 덜 타게 되어 아무 곳이나 보드게임하듯 돌아다닌다.)


시원한 냉장고를 열었다. 엄마가 예쁘게 썰어놓은 복숭아가 구석에 놓여있었다. 내가 좋아할 만한 복숭아라고 했었지, 투명한 반찬 통의 뚜껑을 열었다. 한 개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널 만나면 힘이 나. 왜냐면 넌 누구든 진심으로 대하잖아. 솔직히 나는 널 백 퍼센트 진심으로 대하진 않거든. 어느 정도 비즈니스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근데 넌 그럼에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줘. 진심으로 내가 하는 일들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고. 그래서 가끔 널 만나면 힘을 얻는 것 같아.”


입안 가득 과즙이 터짐과 동시에,

오랜만에 만났던 이에게서 들었던 말이

여태 생생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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