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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12. 2024

오, 여기가 스페인?

  이견이 없을 만큼 여행은 늘 좋다.  특히 혼자 떠나는 여행은 많은 유익들을 가지고 돌아오니 더욱 좋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짐 덩어리들을 둘이나 메고 간다.  그것도 나만큼이나 큰 짐 덩어리들을...  이 무지막지한 짐 덩어리들이 여행 끝날 때쯤이면 든든한 동반자들이 되어 있을까?  결과만 좋으면 좋은 거라고 말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로 인한 좌절들은 겪어보지 않고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일 텐데.  결과만 좋으면야 웃을 수 있겠지만 막상 그 과정 속에 있는 당사자는 결코 웃을 수 없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렇다.

     '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스페인이구나.'

    '.....'

    준수는 공항에 도착하자 스페인에 도착했다며 연신 과한 액션을 취한다.  하지만 건우는 여전히 말이 없다.  여전히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넣고 고개를 숙인 채 그저 이곳저곳을 무심한 듯 둘러볼 뿐이다.  내가 신기해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다는 듯.

    '스페인은 무슨.  프랑스거든.'

    순례자의 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건만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처음 듣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설명해 줬잖아.  스페인에 있는 길이기는 하지만 그 시작은 프랑스라고.'

    '아하~!'

    해맑은 표정으로 새로운 지식을 깨달을 때나 내뱉는 탄식을 마주할 때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는 알 수 없는 울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이내 정체 모를 어두운 기운이 몸 밖으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나는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진동이 느껴지는 두 발에 힘을 주어 평온함을 찾으려 노력해야만 한다.  참아.  참아야 돼.  이제 1일이야.

    잠시 낯선 공항을 눈에 익혀두고는 예약해 둔 숙소로 갔다.  생각보다 허름한, 호텔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뚱맞은 4층짜리 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사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의 종류를 정의하기 힘든 주황색과 노란색 중간 어디쯤으로 보이는 계열의 파스텔톤.  깔끔하고 편리하지만 왠지 싸늘한 느낌을 주는 현대식의 호텔보다는 정감 있어 보인다.  우리를 맞이하는 주인장의 넉넉한 외모에서 풍기는 편안함과 친절함도 정겹다.  여기가 로맨스의 나라 프랑스 하고도 파리라니.  내 인생의 일지에 프랑스 파리가 떡하니 기재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평소 꿈꾸긴 했지만 그저 버킷 리스트의 수많은 항목 가운데 하나로만 존재하리라 여겼건만.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아이들에게 고마.... 움을 가져야 할까?  에이, 모르겠다.

    가방을 여행에 적합하도록 재정비를 하고 저녁을 먹을 겸 동네 구경도 할 겸 밖으로 나섰다.  그저 방 안에서 핸드폰만 하길 원하는 두 머스마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니 내가 계획하긴 했지만 참 깝깝하다.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파리 여행.  사랑하는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걷고 있는 모습들이 암수 서로 정겹건만, 나는 시꺼먼 머스마 둘을 양 옆에 끼고, 아니 보디가드처럼 약간 떨어져서 파리 시내를 누비고 있다.  무슨 조직에서 나온 것도 아니구.  그나저나 이놈들이 나중에 지들 엄마한테 파리에서 시내 구경 했다고 말하면 안 될 텐데.  아, 사진이 남아서 안 되겠구나.  근데, 이런 걱정은 도대체 왜 드는 건지.

    파리까지 왔으니 에펠탑은 무슨 일이 생겨도 참아서는 안 되는 코스이니 첫 번째로 방문해 주었다.  2백 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지만 여전히 날렵한 몸매와 우뚝 솟은 자태는 아름다움을 넘어 경외로움마저 느끼게 해 준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한 번만 찍자는 나의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째는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상태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 대답도 안 한다.  처절한 몸짓과 눈물겨운 애원으로 겨우 한 컷 찍고는 이번엔 둘이서 찍으라는데 아놔.  두 놈이 온 몸으로 거부한다.  이럴 땐 같은 마음이네.  같은 마음이니 자그마하게라도 성공인가?  아니구나.  작은놈이 우웩 하며 일순간 한 마음이 되었던 것에 격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찌찌뽕이라도 해줬더라면 어땠을라나.

    결국 사이좋은 형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은 포기하고 다음 목적지인 센 강으로 향했다.  센 강을 따라 산책해보지 않고 파리를 갔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강둑을 따라 이어지는 고딕 양식의 첨탑들과 노틀담 대성당, 유럽 특유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누리려는 수 많은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이 어울려 이색적이면서도 조화롭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따로국밥이다.  나는 낭만의 도시 파리를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려고 정신이 없는데, 큰 놈은 길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애정행각을, 기껏해야 키스 정도의 애정 표현을 하는 커플들의 모습에 기겁을 하면서도 그런 커플만 잘도 찾아내고, 작은놈은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누구라도 한 놈 걸리기만 해 봐라 하는 자세로 땅만 뚫어지게 째려본다.  아, 이 좋은 곳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니.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누리련다.  

    지금 우리 세 사람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따로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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