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저도요."
평소와는 다르게 등교하는 녀석들이 인사를 한다. 웬일이람. 학교에 간다는 녀석들의 인사를 받아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런 녀석들이 뜬금없이 인사를 하니 받는 나도 어색하다. 특히 비록 기어들어가는 소리이긴 하지만 둘째의 목소리를 들어본 게 언제던가. 어색함과 감격이 혼재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화답해 주었다.
"으응. 그래. 끝나면 얼른 와."
학교에 가는 첫째 준수의 표정과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오늘 기나긴 해외여행을 떠나기 때문일까 아니면 수업이 없어서일까? 반면 둘째 건우는 변함없는 무표정에 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무거운 발걸음을 마지못해 떼어내는 듯하다. 그리고 두 녀석은 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를 확실하게 지키고 있다. 벌써 1년이 넘은 것 같다. 워낙에 활달한 성격인 데다 애교도 많아 잘 버텨내겠지 하며 내심 믿는 마음에 내버려 두었던 것을 자신을 방치하고 방관했다고 여겼는지 나한테도 6개월 넘게 말 한마디 없다. 오늘 여행 가는 건 알고는 있는지. 절대 안 간다는 녀석을 어르고 달래고 뇌물에 협박까지 동원해서 겨우 합의했는데.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협상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미처 못다 한 여행 가방을 마저 싸기 시작했다. 한 달간의 긴 여행이기는 하지만 가방은 최대한 가벼워야 한다. 800km를 걷는다는 것은 결코 장난이 아니니까. 그리고 간단한 상비약도 준비해야 한다. 곁에서는 오직 입으로만 모든 것을 처리하는 능력자이자 권력자인 아내가 땀 흘리며 세 개의 여행 가방을 싸고 있는 남편을 도와주기보다는 곧 시작될 한 달간의 휴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듯하다. 마음은 이미 어디론가 떠난 듯하다.
얼추 짐을 다 싸고 잠시 쉬고 있자니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마침내 방학의 시작이자 여행의 시작. 여행복으로 갈아입고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은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아내는 이런 여행을 하기에는 체력이 너무 약했고 이 기회에 푹 쉬고 싶다며 동행을 거부했다. 내심 다행이다 싶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오히려 너무 아쉽다며 쉰소리를 늘어놓았다. 솔직히 아내도 덩달아 방학을 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좋지 않을까? 조금 전의 상황에 비추어 보건대 내 상상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
공항 가는 길에, 공항에서 대기하는 중에, 20시간 가까운 비행시간 중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기를 기대했지만 아이들은 아빠보다는 핸드폰을 선택했다. 아이들에게 핸드폰이란 길이요 진리다. 그래 첫날이니 욕심부리지 말자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순간 '어차피 비행기에서 내리는 그 순간부터 녀석들 핸드폰은 무용지물일 텐데'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자 입가에 묘한 미소가 머금어진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의 유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발견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걷던 길. 길의 끝자락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마을에는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는데. 앞으로 마주치게 될 수많은 어려움은 인생의 고난과 시련을 상징한다는데.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 속에서 개인의 성장과 변화가 있으며, 많은 이들이 이 여정을 통해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회복하고, 내면의 평화를 경험했다고 말들은 하는데. 머릿속에선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휘몰아친다. 내가 체력적으로 감당을 못하면 어쩌지? 혹 아이들 몸에 어떤 문제라도 생기는 것은 아닐까? 남미에서 난민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래도 명색이 남민데 안전 문제에 너무 안일한 것은 아니었나? 안전한 국내 여행이 나았을라나? 이 여행이 과연 아이들과의 관계 회복에 도움이 될까? 가족의 의미와 소중함을 깨닫고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이번 여행으로 인해 발생한 어마무시한 재정 적자를 과연 사랑이라는 보상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무수한 특근과 야근으로 때워야 하는 건 아닐까?
정말 쓸데라곤 하나도 없는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을 때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엔진이 굉음을 내더니 내 몸을 뒤로 살짝 젖혀지게 만들었다. 아, 드디어 출발이구나. 이젠 돌이킬 수 없구나. 쓸데없는 생각 따위는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앞으로 닥칠 현실에 충실하자. 오직 하나의 목적. 아이들과의 관계 회복에 집중하자. 특히 작은 녀석.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떠오른다. 더불어 소박하지만 절실한 나의 바람도 함께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