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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양파 Sep 15. 2015

뉴 키즈  블록 - 1992년 2월 17일

1992년 2월 17일은 우리나라 공연 문화에 있어 일대 혁명의 날이 아닐까 생각한다.New Kids on the Block(뉴 키즈 온더 블록)의 내한 공연이 있던 바로 그 날이기 때문이다. 올림픽 체조경기장은 공연 30여 분 만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10대 소녀 2백여 명이 넘어지는 아찔한 사고가 일어났으며,  그중 1명은 압사로 인해 뇌사상태에 빠졌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이 사고의 여파로 공연기획사 대표는 업무과실치사상 및 공연법 위반 협의로 구속까지 됐다.



바로 그 곳에 그 모든 과정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자가 있었으니, 바로 나다. 왜 그런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 10대 학생을 언론에서는 2~30대 여성이라고 했는지,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을 지금 풀고자 한다. 1992년 2월 17일 그 날의 사건을 말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가수 이름과 제목을 외우지 못하는 내가 유일하게 노래까지 달달 외우게 만들었던 그들이 있었다. 바로 New Kids on the Block(뉴 키즈 온 더 블록)이다. 도니 월버그, 대니 우드, 조나단 나이트, 조이 맥킨타이어, 조던 나이트, 5명으로 구성된 잘 생기고, 섹시하며, 터프함에 귀여움까지 모든 걸 다 갖춘 보이그룹 되시겠다. 특히 조나단 나이트와 조이 맥킨타이어를 가장 좋아했다. 지금이야 섹시하고 잘 생긴 남자가 좋지만, 그때는 노래 잘하는 조나단과 팀에서 막내이자 귀염을 담당했던 조이가 좋았다.



최근에는 유재석 때문에 유명해진 뉴 키즈의 대표곡 Step By Step과 Tonight, Please Don`t Go Girl 등 노래 제목에 가사까지 달달 외울 정도로, 일명 뉴 키즈 빠순이었다. 빠순이라고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으로 팬클럽 가입은 꿈도 못 꾸고 그저 앨범을 사고 브로마이드를 모으는 것으로 팬으로써의 역할을 다했다. 참고로 부모님 생신은 가끔 놓치더라도, 그들의 이름과 생일은 물론 태어난 곳까지 달달 외웠다. 지금은 포털에서 검색을 하고 나서 이름을 알게 됐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에게 걸려 온 전화로 인해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건 바로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내한 공연이다. 공연이 2월이니깐, 아마도 겨울방학 때였던 거 같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지만, 딱히 친한 거 아니고 그저 뉴 키즈를 좋아한다는 동질감으로 가끔 그들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정도라고 할까. 친구는 팬클럽 회원이기도 한 열성적인 빠순이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내한공연을 온다는 소식은 라디오를 통해 듣긴 했지만, 그저 남의 나라 얘기로만 생각했다. 내가 무슨 주제에, 저런 곳을 가. 팬클럽 회원도 아니고, 그냥 수줍은 빠순이일 뿐인데…



팬클럽 회원들이랑 가면 되겠지만, 끝나고 집에 같이 올 친구가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같이 공연을 보러 가자는 전화를 받고, 고등학생 치고는 꽤 비싼 공연 티켓료를 어떻게 구하며, 또 공연 날 집에 늦게 와야 하는데 어떤 핑계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러나 입이 방정이라고, 내 입이 먼저 오케이를 외쳐버렸다. 며칠 후에 공연 티켓을 사러 갈 테니, 그때까지 돈을 준비하라는 친구 말에 학원비를 슬쩍 했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오만원은 넘었던 거 같다. 학생인 내가 이런 큰 돈을 당장 벌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약속은 했는데 취소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엄마 몰래 나쁜 짓을 해버렸다. 그리고 한 달 동안 학원 간다면서 밖에 나와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사서 고생했지만, 후회는 안 한다.



티켓 구입까지 마치고, 2월 17일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공연 이틀인가 하루 전인가 그들이 드디어 우리나라에 왔다. TV를 통해 그들의 입국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흩날렸다. 참고로 친구는 직접 공항까지 갔다.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다. 역시나 같이 가자고 했지만, 공연에 가는 것도 완전 겁을 상실한 행동인데 공항까지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2월 17일, 그 날이 왔다. 신경 써서 머리도 하고, 옷도 입고 만만의 준비를 마치고 잠실 올림픽 체조경기장으로 친구와 향했다. 그리고 입장, 착석, 이젠 그들이 나오는 일만 남았다. 공연을 기다면서 주위를 보니, 무슨 대학생 언니들이 이렇게 많은가 했다. 고등학생은 나와 친구밖에 없는 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나와 같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으로 착각했던 거 바로 짙은 화장 때문이었던 것이다. 공연 사고 직후 9시 뉴스에서 2~30대 여성들이 사고를 당했다고 나왔는데, 충분히 그러할 만 했다. 솔직히 좀 무서웠다. 더불어 괜히 왔다고 생각해서, 나갈까 하고 고민하던 차 그들이 등장했다.



첫 곡이 스텝 바이 스텝이었나? 기억은 안 나지만, 화려한 불빛이 터지고 나서 5명의 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광란의 공연이 시작됐다. 집에 가고 싶다는 내 생각은 어느새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버리고, 열광적인 빠순이로 변신해 버렸다. 지금이야 디카에, DSLR에 고급 사진 장비가 있지만, 그때 내가 갖고 간 건 아무리 줌을 당겨봐도 그들이 점으로만 나오는 전자동 필름 카메라였다. 그나마 필름을 4통이나 챙겨가서 마구마구 찍어댔지만, 결국 점과 불빛만 나왔다. 그래도 보물이라고 필름에 인화한 사진까지 잘 보관했는데, 사라져버렸다. 버린 기억이 없으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쉽게도 어디에 보관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꽥꽥 소리 지르면서 따라 부르고, 사진 찍고 감격에 감동까지 벅차 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연이  중단됐다. 아마도 공연 시작 후 30여분이 지났을 때였던 거 같다. 무대만 비추던 조명이 사라지고 경기장 전체가 밝아질 때, 순간 공포가 왔다. 내가 있던 자리는 A석으로 체조경기장 2층에 해당되는 공간이었다. S석은 무대 바로 앞 경기장 바닥이었고, SA석은 1층으로 SA와 A는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곳으로 무대를 아래로 쳐다봐야 했다. 그런데 S석은 경기장 바닥으로 8열 횡대(?)로 사람들이 앉아서 공연을 위로 쳐다봐야 했다. 의자도 없었고, 자리를 분리하기 위한 바리케이드도 전혀 없는 학교 전체 조회시간에 학생들을 세우는 거처럼 그렇게 사람들이 앉아서 있다가 공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르르 앞으로 몰려나갔다.



내가 공포를 느낀 이유는 바로, 공연 전 경기장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다 앉아 있었는데, 그 바닥이 심하게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즉, 뒷부분에 앉았던 사람들이 좀 더 앞으로 가서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앞에 있는 사람을 밀었던 것이고, 그 밀림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휑하니 엄청난 공간이 생겨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테니깐, 그럼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무대 쪽을 보니, 거긴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밀고 밀린 사람들로 인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 압사로 인해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 이때 처음 알게 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9시 뉴스에서 이 사건을 무지 크게 보도했고, 부모님은 속였지만 친오빠한테는 말을 했었다. 부모님이랑 함께 뉴스를 본 오빠는 걱정이 된 나머지 엄마에게 말을 했고, 엄마는 내가 무슨 사고라도 당했을까 봐 걱정하셨다고 한다. 그때는 휴대폰은 고사하고 삐삐도 없었으니 딱히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별일 없겠지 라고 믿는  수밖에 말이다. 근데 솔직히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 뉴스 화면에 내 얼굴이 나오고, 그걸 아버지가 보면 집안 망신으로 내 머리카락이 다 뽑히는 대형사고로 커질까 봐 걱정하지 않으셨을까? 아쉽게도 돈이 없는 딸내미는 카메라에 절대 잡히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뉴스에 내 얼굴이 나올 거라는 기대감은 애당초 할 필요가 없었다.



사고로 인해 공연은 당연히  중단됐고, 그들은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때를 노려 SA석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아래로 내려가서 원래부터 S석 사람인 거처럼 뒷부분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걸 보던 친구가 내려가자고 해서 S석까지는 못 내려가고, 2층에서 1층으로 즉, A석에서 SA석으로만 내려갔다.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공연이 재기되지 않았다. 공연이 취소됐다는 공지가 없으니, 사람들은 그냥 기다리기 시작했다. 물론 집으로 간 사람도 있었겠지만, 기다리면 그들이 다시 나올 거라는 기대감에 갈 수가 없었다. 심심해지기 시작했는지, 옆에 있던 짙은 화장의 누군가가 "어디 사세요"라고 물어본다. 그래서 "000이요"라고 대답하니, 그런 동네가 있냐고 지들끼리 키득거린다. 그래서 "당신은 어디 사세요"라고 되물어보니, "압구정이요, 청담동이요"라고 대답한다. 다시 급 위축된 나는, 시선을 앞에만 고정시켰다. 그러고 보니 군청색 제복을 입은 무리가 하염없이 경기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일대 경찰들을 총 동원했는지, 그 무리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들어오기 시작했고, 바둑판 모양처럼 앉기 시작했다. 표를 그리 듯 열과 행을 맞춰 사람들을 가뒀고, 일어나서 뛰거나 앞으로 가지 못하게 인간 바리케이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공연 시작 후 30여분 만에  중단됐고 다시 공연이 재기된 건 4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몰래 승격한 SA석 자리를 뺏길까 봐 겁나서 화장실 한번 못 가고 기다렸다. 12시쯤 공연이 다시 시작됐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노래하고 춤을 췄지만, 왠지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따라 부르고 소리 지르고 나름 팬으로서의 본분은 충실히 다했지만, 가끔 조명 속 보이는 군청색 제복이 신경 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무슨 죄일까 싶다. 알지도 못하는 곳에 와서 인간 바리케이드를 해야 하니 말이다. 더불어 그들에게 갇혀 공연을 봤을 그녀들은 또 어떨까 생각하면, 미치고 싶은데 제대로 미칠 수 없었겠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공연이 끝이 났다. 이렇게 늦게 끝날 줄 몰랐다. 사고만 없었다면 공연은 10시쯤 끝이 나고, 난 독서실에 있다가 늦게까지 공부하고 왔다고 하면 완전범죄가 될 줄 알았다. 뉴스에 이 사건이 보도됐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집에 가서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나 그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이 고민보다 더 큰 고민은 집까지 가는 방법이 문제였다. 집에 갈 버스나 지하철은 없고, 새벽 첫차를 기다리기에 잠실 올림픽 주변은 너무 껌껌했다. 사람들을 따라 큰 길까지 나와 보니, 문제의 심각성이 제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사고 소식이 방송에 나왔다는 소리를 알게 됐다. 픽업하기 위해 경기장까지 온 강남 엄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를 찾은 아이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우리는 태워다 줄 고급 세단은커녕 자전거도 없었다. 뉴스에 나왔지만 오빠가 제발 고자질을 안 했기 바라면서, 더 늦기 전에 집에는 가야겠기에 택시를 잡았다.



"나 돈 없는데"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나 5천 원 있다"고 하고 막무가내로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000 가야 하는데, 제가 5천 원 밖에 없거든요. 갈 수 있나요?"라는 내 말에 택시기사는 말없이 출발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잠실에서 우리 집까지 5천 원이면 충분한 아니 넘치는 금액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면 택시기사가 미터기를 끄고 출발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너무 적어서 그랬나? 그러나 그때는 따지고 할 틈이 없었다. 그저 집에 갈 수만 있다면, 이 생각만 했다.



새벽 3시쯤 집에 도착했고, 조용히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이 올 때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공연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더불어 완전범죄를 했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 밥을 먹고 학교에 온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영웅이 됐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전리품처럼 떠들고 다녔다. 아이들로부터 완전 부러움을 받으면서 말이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오니, 그때서야 알게 됐다. 오빠가 고자질을 했고, 아빠가 아실까 봐 엄마와 오빠가 알아도 모르는 척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별 사고 없이 집으로 왔으니, 그리 크게 혼나지 않았다. 역시 방송에 내 얼굴이 안 나와서 그런가 보다.



New Kids on the Block(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내한 공연 영웅담과 나의 빠순이는 한동안  계속됐다. 그 해 가을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들의 등장 이후로 팝에서 가요로 좋아하는 음악 장르가 바꿨으면 나의 빠순이 활동도 New Kids on the Block(뉴 키즈 온 더 블록)에서 서태지와 아이들로 갈아타게 됐다. 물론 영웅담은 지금도 가끔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꺼내긴 하지만 말이다. "너 그거 알아? 내가 그 공연 현장에 있던 사람이잖아"라고 하면서 말이다.  



절대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10대 시절의 추억을 갖게 해 준 New Kids on the Block(뉴 키즈 온 더 블록), 지금은 이름도 노래도 검색을 해야 알 수 있지만, 그들이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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