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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쮸댕 Aug 23. 2022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

임신 6주 만의 유산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여기서 잠깐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대체 나쁜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테면 시 같은 것으로." 이 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일 것이다.
<아무튼 메모>, 정혜윤-



그날 아침은 결혼하고 제일 크게 싸웠다. 정말이지 둘 다 들고 있던 시한폭탄을 콧구멍에 들어간 먼지 하나 때문에 터뜨려버린 느낌이었다. 원인이 너무 사소했던 나머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고 미워하고 원망했다.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섰다. 출근길 내내 화가 식히지 않았다.


매번의 싸움이 칼로 물 베기였기 때문에 메신저로 서로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 여전히 미운 감정은 남아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초음파 검사가 있는 날이어서 어쩔 수 없이 남편과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 병원 건물 앞에서 만나는데 다정하게 웃어줄 수가 없었다. 접수를 하고 그저 표정 없이 소파에 앉아 대기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이미 익숙해진 굴욕 의자에 올라가 초음파 확인을 기다렸다. 선생님이 초음파로 자궁을 들여다보셨다. 화면에는 아기집이 보였다. 그 안에 더 작은 세포인 난황도 보였다. 태아 심장소리를 듣기로 한 날이었는데 한참을 보시던 선생님께서 아무 말씀을 안 하셨다. '뭐지? 왜 아무 말씀을 안 하실까'


선생님은 말없이 초음파실을 나가셨다. 그때부터 확신했던 것 같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그렇지만 제발 아니기만을 바랐다.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남편을 불렀다. 선생님은 우리 둘을 앉혀놓고 안타까운 얼굴로 말씀하셨다.


"아기집이 더 이상 안크네요..."



짐작컨대 병원 방문일 이틀 전쯤부터 성장을 멈춘 거라고 하셨다. 5초가량 침묵이 흘렀고


"그럼 이제 어떡하죠?"


라고 내가 물었다. 다음 스텝을 질문하던 그때의 나는 의외로 덤덤했다. 초음파 검사 때 선생님 반응으로 짐작했던 터라 명백하게 첫 번째 충격이 아니었다


또 덧붙이자면 몸이 가장 먼저 이 사건, 유산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 같다. 몇 주 전 임신 사실을 확인하려고 편의점에서 급하게 임테기를 샀던 것도 컨디션 변화를 스스로가 감지해서였다. 전에 없던 피로와 가슴 통증, 배 콕콕, 매스꺼움이었다. 이런 것들이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컨디션이 이상하리만치 좋아지고 있었고 상당히 불안했다.




돌이켜보면 임신을 알게 되고 유산 선고를 받을 때까지 내내 불안감을 안고 지냈다. 하루하루 무사히 버티는 게 목표였다. 조그마한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아침에 남편과 싸운 것도 서로가 너무 조심스러웠던 탓에 쌓인 불만의 폭발이었다.   


일주일 뒤 소파수술 예약을 잡았다. 자궁에 잔류한 태아 및 임신 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이다. 병원을 나오고 남편이 그토록 서럽게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커다란 사람이 조그마한 아이처럼 울었다. 다 자기 탓이라고 했다. 아침에 소리 질러서 아기가 떠난 것이라고. 미안하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등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위로해주었다.  


"아니야 오빠 탓 아니야"


진심으로 그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 유산을 겪으면 산모들은 본인 탓을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 뭘 잘못 먹었나? 괜히 그때 무리했나? 이런 생각들을 자꾸 한다고 한다. 그 당시 나는 이 모든 걸 미리 예견했던 사람처럼 자책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저 운명이 우리에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말해준 것 같았다. 좀 더 간절해지고 생명의 소중함을 더 깨달을 때 다시 천사를 보내주겠다는 뜻 같았다.




 회사로 복귀하고 멍한 상태로 오후를 보냈다. 누구에게도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팀원들과 인사하고 집으로 향했다. 제정신은 아니었던지 지하철 역 하나를 더 지나쳤고 그곳에 내려버렸다. 비극적 연출을 위한 준비된 장치처럼 추적추적 비가 왔고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한참을 울었다. 남편이 열 배 스무 배는 더 많이 울었다. 5년가량의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지만 신혼생활도 연애와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여전히 남자 친구고 그저 동거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우리가 똑같은 아픔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우리만큼 이 사건에 대하여 슬플 수 없었다.


이상했다.


그제야 비로소 가족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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