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생각이 너무 뭉툭해졌어. 이 뱃살처럼"

번아웃

by 정주구


"그래, 두 끼 정도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뭐가?"
"뭐든.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든, 하고 있는 일을 잘하는 것이든"
"그래. 지나가는 건 그렇다 치고. 근데 나 생각이 너무 뭉툭해졌어. 이 뱃살처럼"
"난 너 멋있는데"
"뭐가?"
"시행하는 것에는 주저함이 없고, 착오에 대해서는 책임질 줄 알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거 되게 힘든 거야"
"너도 멋있어. 누가 이런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싶으면 여지없이 자기가 해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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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가 체질 中]


나탈리카르푸셴코의 <Blue depth> 드로잉


본래 드라마를 잘 안 보고, 한번 본 영상물은 두 번까지 잘 안 보는 필자인데.

이 대사가 나오는 '멜로가 체질'은 세 번쯤 돌려본 것 같다.


보기 드문 뼛속까지 성숙한 드라마라고 느껴지기 때문.

성숙한 '척'아니고 성숙하다.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고, 사상을 강요하지도 않는 점에서 오히려 자유롭다고 느꼈다.

참 어른의 드라마이다.



매 화마다 기록하고 싶은 말들이 나오는데,

오늘 본 2화에서는 저 대화가 가슴에 꽂혔다.


요즘 내가 그렇다.

딱히 가지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없고, 배우고 싶은 것도 없다.

그리고 그 無의 생각에 적응해 버려서 기분 나쁜 불편함만이 존재한다.

스스로도 이게 어떤 상황인지 감이 안 잡혔었는데,

드라마에서 나의 상황을 관통하는 대화가 오갔고

비로소 나는 인지하게 되었다.

아, 나 지금 뭉툭한 상태구나.


모든 일의 시작은 인지라던데,

추상적인 본인의 상태를 영상으로 보고 듣고, 타자로 치니, 속이 시원하다.


이 말을 한 당사자는 곧바로 가진 돈을 기부하고,

안락하고 큰 집에 칩거하는 것을 멈추고 무언가를 하고, 밖을 나간다.

일단 생각을 뭉툭하게 만든, '절실함을 없앤' 것 들을 멀리 두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드는 생각.

나는 그저 이 생활과 無의 상황이 익숙해진 것일까,

내 주위에 '절실함을 없앤'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생각이 너무 뭉툭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