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9일
20대의 대부분 시간을 해외에서 보낸 나는 새롭고 예쁜 곳을 갈 때마다 ‘이 정도면 다 봤다. 이 것보다 예쁜 곳은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또 다른 곳을 가면 거기가 다시 ‘제일 예쁜 곳’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뻤던 시간과 기억들은 미화되어 가장 하이라이트 부분만 머릿속에 남는다. 길이 봉쇄되어 72시간 동안 차를 타야 했던 상황에서 동행들과 단 한 시간이라도 차에서 웃고 게임하고 보냈다면 나머지 71시간은 비록 잠만 자고 짜증만 냈을지언정 “우리 그때 차에서 진짜 재밌었지 않아? 72시간 동안 갇혔는데 바깥 풍경도 보고 게임도 하고 그랬잖아” 라며 좋았던 기억으로 남게 된다. 이런 기억들이 쌓이다 보니 깨달았다. 나에게 남는 좋았던 기억은 ‘가장 예쁜 풍경’이 아니라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풍경은 사진이 남겨주고 기억은 내가 남긴다. 그래서 그다음부턴 소위 말하는 관광지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거긴 사진만 찍는 곳 일 뿐이니.
호주에 워홀 갔을 때도 그랬다. 일 하러 간 건 아니었지만 천성이 가만히 있질 못해서 매일 투잡, 쓰리잡을 뛰었다. 일이 끝나면 숙소에 중국인, 한국인 친구들과 한두 시간 얘기하며 노는 게 전부였다. 근데 그 한두 시간 즐겁게 놀았던 기억 때문에 호주가 계속 생각나고 다시 가고 싶다. 그래서 옛날에 어른들이 “젊을 땐 놀아”라고 했었나 보다. 24시간 동안 공부, 일도 하지 말고 놀라는 뜻이 아니었다. 어른들에게 젊은 시절은 1년간 일했던 기억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놀았던 기억이 더 생생하게 남아 있을 테니.
그렇게 놀았던 시간들도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항상 함께였다. 모든 상황들은 예기치 못한 우연의 연속이었다. 기대가 없어야 만족하고 실망도 안 하는 것처럼 우린 ‘생각도 못 한 상황’이 생기면 그 순간이 좋았었다고 기억에 남긴다.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오늘 산책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같이 있던 사람과 하루 종일 방에서 영화만 봤다 이러면 ‘그때 비도 오고 하루 종일 영화만 봤던 그 날 분위기 있고 좋았어’라고 하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나의 추억’에 항상 사람을 곁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이 마치 우연인 것 마냥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알고 보니 사람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시간을 공유할 누군가가 항상 옆에 있었기에 나의 추억이 아름다웠다.
지금부터라도 좋은 기억이든 안 좋은 기억이든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보내며 공유하자. 그리고 누가 기억을 얘기해 준다면 공감 해 주자. 상대방에게 베푸는 친절과 배려인 줄 알았는데 사실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