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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Jun 14. 2023

탐라의 가이아 설문대할망

제주축제자랑 - 설문대할망 페스티벌

  5월이 가정의 달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만, 설문대할망의 달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설문대할망은 제주섬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키가 아주 큰 여신으로, 매년 5월 돌문화공원에서는 설문대할망을 기리기 위해 설문대할망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설문대할망 이야기가 신화냐 전설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신화의 조건 중 하나가 '신격화되어 그를 모시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이상하게도 굿판의 나라 탐라국의 수많은 굿 중 설문대할망을 기리는 굿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설문대할망 이야기가 신화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설문대할망 신화가 거신(거대한 신)이 등장하는 다른 나라의 창조신화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설문대할망은 옛날 옛적 제주도가 있던 곳이 바다였던 시절, 치마에 흙을 일곱 번 퍼 날라 제주도를 만들었다. 이때 치맛자락에서 떨어진 흙이 오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처음 흙을 퍼다 날랐을 때 한라산은 뾰족하게 치솟아 있었는데, 한라산에 앉아 빨래를 하자니 엉덩이가 아프고 베개로 베자니 너무 높아서 할망이 한라산 위를 뽑아 던지니 날아가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라산 윗 둘레와 산방산 둘레를 재 보면 그 길이가 딱 맞다고 하니 정말 할망이 뽑아 던져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할망이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발이 바닷가에 닿았는데, 어느 날에는 누워 기지개를 켜다 발을 잘못 뻗어 범섬에 발가락 구멍을 냈다. 지금도 범섬에는 할망의 발가락이 쿡 하고 찌른 흔적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할망이 고개를 숙이고 빨래를 하다 떨어진 족두리와 할망이 요리를 하려고 솥을 올려 두었다던 솥덕바위도 제주 곳곳에 남아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데 할망은 발가락 구멍과 족두리, 요리해먹은 흔적 등을 남긴 것이다. 베개가 높아 짜증을 내고 빨래를 하다 모자를 떨어뜨리는 이토록 인간적인 창조신이라니. 신들의 행동 양상이 인간의 모습과 비슷해 사랑을 받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태초의 여신 가이아가 있다면 탐라신화에는 설문대할망이 있었다.


할망의 발가락 자국이라고 하는 범섬 해식동굴(좌) / 할망이 쓰다 벗겨진 족두리(우)





  제주의 가이아, 설문대할망을 기리기 위해 5월마다 설문대할망 페스티벌을 연다는 제주 돌문화공원에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작은 오솔길부터 너른 잔디밭, 돌 박물관과 야외 전시장이 있어 산책하듯 즐겁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공원에서 유독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었다. 바로 '오백장군'과 '모성', 그리고 '죽솥'이다. 안내 책자에는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상징탑', '오백장군 군상', '오백장군 상징탑', '죽솥을 상징한 연못'이라는 이름이 주요 이정표마다 찍혀 있었고, 이 공원의 대표 포토스팟인 하늘연못조차 죽솥을 상징해 만들었다는 안내판이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오백장군이라 불리는 우뚝 솟은 돌 형상과 모성, 그리고 죽솥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강조되는 이 돌문화공원을 거닐며 제주에 깃든 아름답고 가족애 넘치는 이야기를 상상하다 결국 실상을 알게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와 먹을 죽을 끓이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죽솥에 빠져 죽어 버렸다. 아들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돌아오자마자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여느 때보다 정말 죽 맛이 좋았다."


 설문대할망 페스티벌을 제대로 알고 즐기고 싶었을 뿐인 나는 안내판을 읽다가 잔혹동화 뺨치는 그로테스크한 할망의 죽솥엔딩에 말을 잃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떤 감동적인 이야기를 상상하며 지나쳐 온 '어머니를 그리는 선돌'이며 '오백장군 군상'들이 충격에 휩싸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죽 맛이 좋았다는 부분은 대체 왜 들어있어 심란함을 더하는 것인지.


  심지어 설문대할망 페스티벌 프로그램 중에는 '설문대할망 사랑의 고사리 죽 먹고 오백장군 되어보기'가 있어 이 페스티벌이 전체연령가가 맞는지 의심해 보게 되었다. 9살의 내가 설문대할망의 죽솥엔딩 이야기를 들었다면 죽을 먹다 체하고 3일은 밤잠을 설쳤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설문대할망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큰 키를 자랑하곤 했던 할망이 그날도 키자랑을 하기 위해 물장오리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 또 하나는 끓이던 죽솥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물장오리오름의 화구호


  설문대할망 페스티벌이 벌어지는 돌문화공원에서는 후자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데, 지형 창조를 끝낸 할망이 오백 장군을 낳은 후 어느 날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아들들을 위해 커다란 솥에 죽을 끓이다 그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499명의 아들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가 죽을 보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고 늦게 도착한 막내가 죽솥을 휘젓다가 사람 뼈를 보고 어머니가 빠져 죽은 것을 알게 되었다. 막내는 불효한 형들과 같이 있을 수 없다며 차귀도까지 뛰어나가 울다가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어 버렸고 이 사실을 알게 된 499명의 다른 아들들도 울다가 바위가 되어버렸다.






  그럼 도대체 왜 제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섬을 창조했다는 설문대할망을 끝내 죽이고 만 것일까. 어떤 연구자들은 제주에서 육지로 가는 다리를 놔주지 않고 섬으로 고립되게 한 것에 대한 보복심리로 사람들이 할망이 죽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고 이야기 한다. 또 누군가는 남성 중심의 유교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창조신이 아닌 '어머니'로서의 위치에 놓이고 끝내 요리를 하다 죽음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구전되어 내려온 이야기로써 설문대할망이 때로는 제주 사람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섬의 시초에 대한 상상력을 원 없이 펼치는 데 있어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엉뚱하고 인간적인 행동으로 웃음을 주고, 또 때로는 섬에 고립된 것에 대한 원망을 풀 대상으로 마음껏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이야기하는 주체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며 원 없이 주물러진 설문대할망이야말로 제주 앞바다를 품을 만큼 넓은 아량과 한라산만큼 높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그러다 결국 스스로 자손들을 먹이기 위한 밑거름이 되어버렸다는 결말은 설문대할망이 마지막까지 제주 사람들을 위한 어떤 희망의 존재로, 먹고 살기 힘든 제주에서 누군가는 몸을 마쳐 우리를 먹이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감사와 희망의 존재로 거듭났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탐라의 가이아보다 탐라의 예수님이 더 적합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출처:

https://www.newsj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042

https://www.yna.co.kr/view/AKR20230526094300056

http://www.jejuilbo.net/news/articleView.html?idxno=203873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53712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53712

http://www.culturejeju.kr/news/articleView.html?idxno=797

논문 - 설문대할망 설화 연구, 제주도 설문대할망 이야기의 신화적 성격

책 - 섬이 된 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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