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떨쳐내는 방법
꽁꽁 언 땅이 녹을 3월 즈음, 생태건축 학교 수업을 듣고 싶어 신청서를 냈는데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수업의 정원이 꽉 차긴 할까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공지를 늦게 보고 느긋하게 신청했더니 선착순에서 밀려버렸다.
올해는 꼭 시골에 집을 짓는 것을 시작이라도 해보자 하는 목표를 정해놓고 세운 계획이었는데, 수업에 떨어진 바람에 그날 하루는 완전히 멘붕이었다.
생태건축 학교는 찾아보기도 힘든 데다가, 위치와 가격, 교육 기간 등을 따지면 나에게 딱 맞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계획이 틀어지니 내가 가려던 길이 다시 뿌옇게 흐려진 기분이었다. 자주 열리지 않는 수업이라 더 막막했다. 올해는 더 이상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또 이렇게 한 해를 도시에서 보내야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안됩니다."
유명 철학 유튜버의 한 마디에 뭔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렇지.'
인생은 계획대로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불확실한 미래를 설계한 후 뭐라도 계속 통제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목표가 크면 클수록, 멀면 멀수록 불확실성은 떨어진다. 한마디로 그 계획대로 될 확률은 낮아진다는 뜻이다.
같은 유튜버는 말했다. 현대인의 대부분의 삶을 지배하는 목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인간의 삶에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인간이 생겨난 게 아니라고.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과학으로 밝혀냈다.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를 함께 살아가는 동식물들 모두 수많은 돌연변이 중 우연히 현재의 지구환경에 잘 맞는 종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현재를 충만하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자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 좌절하고 우울하고 불안해할까?
인생에서 어떤 단 하나의 목적, 그것만 두고 '난 이것을 이루고 나면 완전해질 거야, 행복해질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다. 예컨대 한강뷰 아파트, 몇십억의 자산, 건물주, 유튜브 인플루언서 등 어떤 가치관을 배제한 채 수치화된 목적은 삶이 될 수 없다. 그것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그래서 이게 맞나?' 하는 질문이 곧 따라올 것이다.
현재를 충만하게 산다는 것은 현재 내가 하는 일에 100% 몰입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나도 짧지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종종 있었다. 어떤 글을 쓸 때, 재밌는 책을 읽을 때, 그림을 그릴 때, 풀바구니를 짤 때, 밭에서 잡초를 벨 때, 냉이를 캘 때, 요리를 할 때, 운동을 할 때, 심지어 고양이를 만질 때조차도. 과거나 미래가 온전히 잊혀지는 순간이었다.
특히 업에서 분리된 농사라는 일. 내 먹거리를 키우는 일은 굉장한 몰입의 경험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현재에 집중하는 삶이다. 물론 허리도 무릎도 아프고 땀도 많이 흘린다. 초가을이면 모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렇지만 내 눈앞에 땅이 있고, 내 손안에 씨앗이 있다면 그것을 뿌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그 씨앗에서 싹이 나면 그 주변의 풀을 잡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람이 있을까. 농부들이 건강해 보이고 시골 할머니들이 치매에 덜 걸리는 이유를 알겠다. 새 생명이 움트는 자연의 섭리를 느끼고, 거름을 주며 순환을 배운다. 계절은 그렇게 반복되고 봄이 오면 나는 또 씨앗을 들고 밭에 갈 것이다.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농사이다.
그래서 그런지 농한기인 겨울만 되면 나는 또 나를 잠식하는 생각에 빠진다. 올 초에는 내가 지향하는 삶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이를 빠른 시일 내에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아직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계획을 완수하지 못할 때마다 좌절하곤 했다. 지향하는 바가 강할수록 좌절감은 더 크게 느껴진다.
그렇게 싫어하는 운동을 꾸준히 하게 되는 원동력은 뭘까? 20대까지만 해도 운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회사 다녀와서 아무리 피곤하고 녹초가 되어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운동을 싫어했고, 마라톤에 돈을 내고 참여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30대가 되고 나니 몸이 달라지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똑같이 먹어도 살이 쪘고, 몸이 지치는 느낌이 더 빨리 찾아왔다. 운동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지난 3년여간 수영과 풋살, 요가를 꾸준히 해왔다. 처음엔 반만 가도 헐떡이던 수영을 이제는 상급반에서 두 바퀴를 연속으로 돌아도 괜찮은 체력이 되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입문하게 된 풋살은 여전히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을 받고 침착하게 패스로 연결하는 실력까지는 되었다고 자부한다. 가끔 아침에 몸을 풀려고 시작했던 20분 요가는 이제는 능숙하게 동작을 연결하게 되었다. 다리를 조금 더 찢을 수 있게 되었고, 유연성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다. 운동할 때 힘든 느낌은 여전히 싫다. 그런데 운동을 가고 싶다. 대체 왜? 운동이 끝나면 몸이 개운하고 아프던 허리가 펴지는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하다. 수영을 할 때는 물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고, 풋살을 할 때는 팀원들과 나와 공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 현재에 몰입하게 된다는 뜻이다. 요가를 할 때도 동작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운동은 그냥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 무슨 어마어마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 몸이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한다. 농사일은 어떠한 목적의식으로 시작한 것은 맞지만, 뙤약볕 아래에서 씨앗을 심고 풀을 잡고 하는 힘든 일은 그냥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 (돈을 내긴 했지만) 나에게 주어진 땅이 있고, 함께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한다. 지금 이 시기에 하지 않으면 1년 농사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한다. 그리고 그렇게 키워낸 농작물을 수확할 때 느끼는 맛을 잊을 수 없어서 한다.
미래에 되어있을 나의 목표를 상상하며 나를 비교하면 더없이 불행해진다. SNS에 비친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SNS에는 좋은 찰나의 순간들만 올리기 때문에, 목표하는 미래의 나에게서는 좋은 모습만 비춰지기 때문에,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몰입은 생각보다 소소한 것에서도 가능하다.
책상 앞에 붙여놓은 '올해의 목표' 포스트잇을 찢어서 버렸다. 굳이 수치화해서 목표를 적어놓지 않아도 나는 어쨌든 그 방향으로 갈 것을 안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만 정확하다면 그것이 몇 년이 걸리든 나는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를 수치화하고 쉽사리 루저로 만드는 목적주의에서 벗어나야겠다. 현재에 조금 더 충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