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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Jan 06. 2024

단식 다섯째 날

본능을 거스르기, 중심 잡기

단식을 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내 욕구를 참아보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이다. 먹는 것이 중요했던 나는 잠깐의 배고픔도 잘 참지 못했다. 물론 주위에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현대인들의 공통된 특징일 것이다. 밥때가 조금 늦어지면 성미가 급해지고 날카로워지기 시작한다. 회사 다닐 땐 더했다. 밥 한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이걸로 예민해지는 내 모습이 싫었다.


욕구를 참지 못하는 세상.

스마트폰이 발달하고 배달 시스템이 편리해지면서 점점 더 심해진다. 요즘 아이들은 조금만 보채도 유튜브를 보여주니, 더 참을성이 없는 아이로 성장할 위험이 있다고 한다.

공허한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은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시시때때로 소비를 한다. 스트레스 비용으로 사실상 많은 필요 없는 것들이 구매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생산-폐기의 선형 시스템은 쓰레기를 낳고 탄소를 배출한다. 생산-수거-분리-재생산의 순환형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그나마 쓰레기 문제를 줄일 수 있다.


퇴사 후에 소비를 대폭 줄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당근마켓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물건이 있는지 수시로 점검하고 당근마켓에 팔거나 버린다. 옷을 구매하지 않은지는 2년 정도 된 것 같다. 패스트패션이 만들어내는 탄소는 전체의 10% 정도이며, 폐수는 전체의 20% 정도라고 한다. 새 옷만 사지 말고, 때론 바꿔 입거나 수선하여 입어도 환경을 위한 큰 실천이 된다.


환경을 위해서 비건까지 하면서 이미 많은 욕구를 줄이긴 했지만, 여기까지는 안전한 터전을 지키기 위해 당위적으로 해야 했던 일이었다면, 음식을 끊어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생존을 위한 본능, 식욕을 참는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변할까 궁금했다. 오히려 비워냄으로써 가벼운 몸과 맑은 정신과 명상을 통해 더 침착하고 영적인 차원의 경험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에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들과 나쁜 뉴스, 혐오와 차별, 분노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않을까?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친구들과 회사에서의 평가, 나를 유혹하는 각종 광고들, 전쟁, 살인, 무의미한 싸움 등. SNS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 와중에 흔들리지 않고 내 중심을 잡기란 참 쉽지 않다. 나 또한 불합리함으로 가득한 사회를 벗어나 연대와 협동으로 작동하는 안전하고 생태적인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퇴사하였고, 퇴사 후 중심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위로도 받으며 무해한 삶을 지켜나가고 있다. 폭력과 착취에 기반한 자본주의 시스템이 특히나 더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삶을 지키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주류에서 멈춰 서서 거대 흐름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것이다. 주류에 몸을 맡기는 것이 본능에 이끌리는 것이라면 이는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더 단단해져야 한다. 온몸에 힘을 주고 땅 속으로 더 깊게 뿌리내려야 한다. 단식은 나에게 수행과도 같다.


‘삶의 몸짓’ (사진:hoho/모델:mina)




단식을 시작한 지 5일, 본단식 2일 차.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에 힘이 없다. 원래 아침이면 과일이나 고구마, 빵, 오트밀 등을 챙겨 먹는데, 먹을 수 있는 게 없으니 늦게까지 누워있었다. 단식 시작날 하필이면 제주감귤이 배송 왔는데, 남편이 열심히 까먹고 남은 귤껍질이 모여있다. 귤피차를 만들려고 모아달라고 했다. 단식이 끝나자마자 귤을 먹을 것이다.


배가 눈에 띄게 쏙 들어갔다. 결혼식 전, 장염에 5일 동안 죽만 먹었을 때가 떠올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혼식 날 어깨선이 날카롭게 드러나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 거울을 보니 그때보다 더 살이 빠진 것 같다.


아침 무른 변을 보았다. 마그밀(변비약)이 이제 효과가 있구나. 누워만 있을 수 없으니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아파트 단지에 대형 폐기물 버리는 곳이 현관 바로 앞이다. 누군가 또 이사를 가려는지 가구를 잔뜩 버려놨다. 쓸만한 목재가 보여서 가지고 올라왔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번쩍 들었을 텐데, 좀 무겁다. 그래도 아예 힘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다시 공원에 갔다. 계단을 오르는데 허벅지가 당긴다. 공원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오히려 힘이 좀 생겼다. 왜 누워만 있으면 안 되는지 실감이 난다.


배가 고프다. 어제는 공복감이 없었는데, 오히려 오늘 좀 더 공복감이 생겼다. 여전히 버틸 만한 공복감이긴 하다. 날씨가 겨울치곤 이상하게 따뜻했는데, 오늘은 살짝 기온이 떨어졌다. 먹은 게 없으니 손이 시려서 보일러를 틀었다. 씻으려고 따뜻한 물에 손을 넣으니 손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면서 금세 빨개졌다. 마치 사우나에서 냉탕에 있다가 온탕에 훅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다.


물로 머리를 감았다. 어제부터 물로만 감았는데 두피 가려움증이 아직도 없다. 왠지 머릿결도, 피부도 더 좋아진 느낌이다. 단식이 끝나도 노푸(No shampoo)를 계속해보고 싶다.


오후에 영화상영회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괜히 신청했나 싶다. 몸이 너무 춥고 힘이 없어서 누워있고만 싶다. 몸이 무겁다기보다는 힘이 없다. 모든 행동이 느려졌다. 하지만 누워만 있으면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아 몸을 일으킨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을 촬영한 다큐 '별은 알고 있다.'를 보러 갔다. 오늘이 전국순회 마지막 상영회라고 한다. 영화관 화장실에서 또 무른 변을 보고 들어갔다. 영화를 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휴지를 들고 들어갔었어야 했는데 잘못했다. 눈물 콧물 다 옷으로 닦아버렸다. 영화가 끝나고 유가족들,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슬프고 화나는 감정이 북받쳤던 탓인지, 영화가 끝나고 힘이 빠지며 잠이 몰려왔다. 대화 시간 동안 잠깐 졸아버렸다.


집에 오는 길,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것이며 만원 지하철에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든다. 힘든 운동을 끝낸 느낌이다. 집에 오자마자 마그밀을 먹고 잠이 들었다.


변이 계속 물처럼 찔끔찔끔 나와서 항문이 매우 따갑다. 씻고 침대에 누워서 저녁잠을 잤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계속 힘이 없다. 그 와중에 먹고 싶은 것은 계속 생각난다. 인스타에 사람들이 먹는 사진들을 많이 올리니 이것도 저것도 다 먹고 싶다. 특히 당기는 것 : 신선한 샐러드, 샌드위치, 과일, 피자, 두유요거트, 당근. 누가 제주 유기농 당근 판매 링크를 올려서 주문해 버렸다. 마침 떨어진 두유와 비건 요거트 스타터도 주문했다. 단식기간 동안에 평소보다 더 많이 사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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