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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Jan 08. 2024

단식 여섯째 날

아기로 돌아간 몸

단식 여섯째 날, 본단식은 3일 차. 이틀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니 믿기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온몸에 힘이 아예 없었다.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무기력감이었다. 극심한 공복감이 느껴졌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니 눈앞이 핑 돈다. 속이 메스껍다. 입이 쩍쩍 마르는 느낌이 들어 급하게 정수기로 갔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물을 들이켰다.


익숙지 않은 증세에 두려움이 생겨 단톡방을 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와 같은 증세를 느낀 어떤 분은 죽염과 꿀물(또는 효소차)을 먹고 나아졌다고 한다. 나도 급하게 죽염을 찍어먹고 효소차를 마셨다. 긴 수면시간 동안 탈수증세가 나타난 것 같았다. 10여분 정도 누워있으니 점점 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문득 건물이 무너진 재난 현장에 깔려 2주 넘게 생존해 있던 사람들의 기적 같은 사례가 떠올랐다. 고작 3일 절식, 3일 단식 중인 지금도 이렇게 힘이 들고 어지러운데, 2주라니. 그것도 빗물이나 오줌 등을 먹고 삶을 유지하는 것 아닌가. 엄청난 생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뜻한 공간에 몸을 뉘이며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어쩔 줄 모르는 눈빛이었다. 단식 기간 동안 남편은 내 눈치를 보며 밥을 먹는 것 같았다. 일부러 외식 약속을 많이 잡고 집에서 밥을 안 먹으려고 했다. 내 앞에서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미안하다고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이니 그냥 먹으라고 해도 급하게 먹거나 간단하게 먹는 정도였다. 되려 미안해졌다. 얼른 씩씩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때쯤 되니 기운이 되돌아왔다. 공복감도 많이 사라졌다. 마그밀과 효소차를 먹었다. 오후에 촬영일이 있어서 샤워를 했다. 3일 내내 물로만 머리를 감고 있는데, 점점 머릿결이 좋아지는 게 느껴진다. 낮아진 체온에 몸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물줄기가 너무 좋아서 저녁엔 꼭 사우나를 가야지 다짐했다.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단단히 동여매고 나갔다. 단식 기간 동안 운전을 못할까 싶었는데, 오히려 몸에 힘이 없을 뿐 정신은 또렷해서 운전이 훨씬 편했다.


마그밀은 수산화마그네슘을 함유하고 있는 현탁액이다. 설사를 유발하여 숙변을 제거하기 위해 먹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잠을 자는 동안 위액이 나와서 배가 고프고, 속이 쓰린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마그밀을 먹는 내내 변이 찔끔찔끔 물처럼 나왔다. 그러다 보니 한 번만 화장실을 가도 항문이 쓰라렸다. 매번 물로 닦아야만 했다. 밖에서 화장실을 갈 때면 그날은 계속 따끔거리는 기분과 함께 해야 했다.


작업실을 가는 5층 계단이 오늘따라 힘에 부친다. 그래도 누워만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움직이니 힘이 난다. 천천히 청소를 하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20대 친구들 다섯 명이서 우정 스냅촬영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젊은 친구들의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즐겁게 촬영을 마치고 나니 또 힘이 없는 게 느껴졌다.


저녁에는 사우나를 갔다. 골반뼈가 선명하게 드러난 내 몸매가 마치 아프리카에 사는 기아들을 떠올리게 했다. 체중을 재보니 2kg 정도 빠졌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금방 다시 찔 테니까 큰 문제는 아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샤워기를 틀었다. 피부가 한껏 보드라워진 게 느껴진다. 순한 비누로 몸에 비누칠을 하고 씻어내는데 미끌미끌한 게, 순간 비누기가 왜 안 내려가나 싶었다. 단식으로 매끄러워진 피부가 좋은 물과 만나 시너지를 발휘한 것 같았다. 그 어떤 온천에서도 느껴본 적 없던 보드라움이 내 몸에서 느껴지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탕 속에 앉아 따뜻함을 즐기면서도, 계속 피부를 만지며 신기해했다. 단식은 아기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특히나 제일 좋아진 것은 두피. 전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두피 가려움증과 비듬에 어떤 방법도 들지 않아 고민이 많았는데, 본단식 기간 동안 물로만 감아도 전혀 문제가 없다. 또한 겨울만 되면 하얀 각질이 일어나는 정강이도 깨끗했으며, 가뭄처럼 쩍쩍 갈라지던 발뒤꿈치도 많이 호전되었다.


원래라면 가뭄처럼 갈라져있어야 할 발뒤꿈치이거늘


산뜻한 기분으로 사우나를 나와 남편과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비건감자탕을 위한 재료를 사기 위함이었다. 혼자가도 된다고 하는 걸 그냥 산책 삼아 같이 가고 싶었다. 사실 이마트에는 더 이상 나의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이 별로 없다. 인스턴트를 많이 줄였고, 동물성 식품을 끊고 나니 먹는 것이 거의 정해져 있다. 유기농 야채는 한살림이나 농부시장, 혹은 어글리어스(Uglyus, 못난이야채 유통 플랫폼)가 더 싸고, 포장도 단순하다. 유기농이 아닌 일반 야채라면 집 앞 소형마트가 가장 저렴하다. 그래도 단식을 하면 다른 음식 냄새에 약해질 줄 알았는데, 비건을 지향한 지 3년이 넘어가니 이 삶이 나에게 온전히 체화되었나 보다. 처음 육식을 줄이면서 좋아했던 음식을 참았던 경험들이 이제는 익숙하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은 오직 하나, 풀*원 식물성 만두였다. 만두 없이는 못 살지...


집에서 남편이 감자탕을 끓이는데, 냄새가 너무나도 좋다. 나도 감자탕 좋아하는데... 비건 감자탕은 감자와 깻잎, 시래기나 배추 등의 잎채소, 버섯, 들깻가루 그리고 맛있는 된장과 고추장만 있으면 손쉽게 끓일 수 있다. 진짜 감자탕 맛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한 마디로 고기 누린내가 빠진 감자탕이다. 남편이 요리하는 동안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계속 다가갔다. 자꾸 남편 어깨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며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바라보니, 남편이 내 고개를 슬며시 돌린다. 아니 냄새만 맡게 해달라고 빌었다. 냄새로라도 대리만족을 하고 싶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효소차를 마셨다. 


밤에 잠들기 전, 농사 동료 유이가 보내준 간청소에 대한 정보를 다시 읽어보았다. 단식 마지막 날 밤과 회복식 첫날 아침, 각각 올리브유를 반 컵(100ml)씩 마시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간에서 담석 또는 담즙이 나온다고 한다. 이는 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숙변이 모두 제거된 후 맑은 물의 형태로만 나오는 변에서 녹색의 덩어리가 보이면 바로 담석이다. 간에서 나오는 담즙은 지방을 분해하거나 콜레스테롤을 배출하는데, 이것이 담낭 내에서 뭉쳐서 딱딱하게 되면 담석으로 변하며, 담석증의 원인이 된다.


담석(gallstones)의 위치*


힘들게 몸을 깨끗이 비운 김에 간청소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다시 태어나는 셈 치고. 그러나 올리브유 반 컵은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향은 정말 좋은데... 이걸 내가 마실 수 있을까? 숨을 참고 눈을 꼭 감은채로 느끼한 기름을 꿀떡꿀떡 억지로 넘겼다. 으... 정말 지독하게 느끼하다. 비위 안 좋은 사람들은 못 마실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마셨으니 반은 성공이다. 내일부터는 회복식 단계이니 뭐라도 음식이 들어간다는 기대감에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든다.


간청소를 위한 올리브유


*담석의 위치 출처 : https://www.drugs.com/cg/gallston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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