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소년은 달달한 목소리로 '내가 니편이 되어줄게'라는 노래로 위로를 전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던 어떤 날, 나는 늦은 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방바닥에 누웠다. 삶이 지겹도록 공허하게 느껴지고, 세상에 내편 하나 없는 듯했던 그날 이 노래가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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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맘을 위로할까
누가 내 맘을 알아줄까
모두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기댈 곳 하나 없네
이젠 괜찮다 했었는데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온 이 절망에
나는 또 쓰러져 혼자 남아있네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
괜찮다 말해줄게
다 잘 될 거라고 넌 빛날 거라고
넌 나에게 소중하다고
모두 끝난 것 같은 날에
내 목소릴 기억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넌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커피소년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속 슬픔을 눈물로 바꾸어 한참 덜어내고 나서야,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일어났던 기억이 난다. 그날 참 위로가 되어주었던 노래다.
세상 아무도 내편이 되어주지 못한다 느끼고, 나 역시 나를 비난하고 못났다고 꾸짖는 그때에 커피소년이 없었더라면 그날 밤을 나는 어떻게 보냈을까.
니편, 내편이라는 이 말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뭐 살면서 편 가르기로 사는 게 어디 있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나란 인간은 참으로 유치뽕짝 했다. 니편, 내편에서 내편이 없는 것 같다고 세상 서럽게 울어대다니... 커피소년이 내편이 되어준다는 이 노래 한곡에서 위로를 얻은 나는 절실하게도 내편이 필요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편이 있다고 하여 무언가에서 이기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공감이 필요했다. 치열하게 사는 매일매일의 반복 속에서 느껴지는 그 공허함이 조금이나마 '공감'이라는 위로로 채워졌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었다. 이기고 지고는 상관이 없었다. 그냥 내 맘을 알아주는 내편이 절실히 필요했을 뿐이다.
이런 마음은 항상 타인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가 내 맘을 알아주었으면... 이해받았으면... 나를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그런 기대감을. 정작 나는 그런 사람인가 돌아보지도 못했으면서 받기만을 바랐다는 것도 모르고.
이런 기대감은 곧 잘 타인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곤 했다. 나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토라지기를 반복하고 스스로를 외로운 고독의 섬으로 데려다 놓고는, 상처받기 싫다며 차라리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평생 외로울 팔자를 타고났다는 어떤 이의 말이 묘한 위로가 되기도 했다.
늘 대상을 찾아 헤매었다. 인생을 걸어볼 만한 대상을,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누군가를, 삶의 물음에 답을 해줄 지식과 배움에 대한 대상을 찾아 갈망했다. 그럴수록 타인에 대한 인정과 비판에 예민해져만 갔고, 늘 허공을 쫒는 느낌 속을 걷는 기분이 들곤 했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떠나지 않으면서 늘 나와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누구일까... 그런 존재가 있을까... 생각했다. 한 명씩, 한 명씩 지우고나니 '나'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내편이 되어준다면, 내가 나를 스스로 사랑해준다면, 내가 나를 위로하고 안아줄 수 있다면 된다는 걸... 숱하게 들어왔던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자신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이 필요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아줄 사람은 나라는 것. 더 이상 외부의 대상에 기대어 이해받지 않아도 언제나 나는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걸 왜 몰랐을까.
외부를 향한 기대감을 거두어들이자 굉장한 자유로움이 찾아왔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평생 지속되는 로맨스이다
- 오스카 와일드-
못나 보이는 나라도, 부족한 나라도, 미숙한 나라도 그래도 내가 내편이 되어주면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