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에게 던져본 단어들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따라 그 생각들을 더듬어가 본다. 내가 느끼고 생각한 의미의 줄기를 따라 단어들의 윤곽을 그려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유의 시간을 통해 이전보다 선명해진 단어의 모서리를 만지작 거리며 그 단어가 내게 주는 고유의 질감을 느껴본다.
마침내 그 질감이 무엇인지 내게 인식되는 순간의 감동을 글로써 아로새겨 넣고 싶어 진다.
'에피파니'라는 단어가 내게 그러했다.
에피파니(epiphany)는 '현현(現現)'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신이 자신을 찾는 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 심연, 배철현, P.76 -
에피파니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인간이 한순간 찰나에 느끼는 그 감정의 지점을 하나의 단어로 포착하여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생소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하나의 지점을 내포한 의미로서 이 단어가 사회에서 통용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드러난 신의 모습과 마주했다는 것일까.
인생의 바닥같이 느껴지는 혹독한 시기에사람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더 이상은 인간의 의지와 힘으로는 어찌하여볼 도리가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작고 미약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각하게 되고 삶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근원 앞에 자신을 내려놓게 된다.
유한함을 인정하고 내려놓는 순간에 어둠 속의 어둠을 걷는 듯한 그 길에서 살며시 고개를 드는 자신의 빛을 발견한다.
그 빛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버티며 살아온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잠들어 있던 자신의 생의동력이다. 그리고 그 빛은 생의 불씨를 다시금 타오르게 만들어 다시 한번 제대로 잘 살아보고 싶게끔 우리들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