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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Sep 30. 2022

빨간 판초가 있는 풍경

페루 마추픽추, 비니쿤카 

“고산병이군요. 어서 마추픽추로 내려가세요!”

요조숙녀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한 한국 여행자가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온다. 리마 숙소에서 ‘가족이 함께 왔지만, 가끔 각자의 여행을 즐겨보라’ 조언했던 젊은 친구들이다.


“고산병일 때는 지금보다 고도가 더 낮은 곳에 다녀오면 씻은 듯이 괜찮아져요. 저희도 그랬어요.”라며 꿀 같은 정보를 전해준다.

‘마추픽추로 내려가?’ 당연히 마추픽추가 쿠스코보다 고도가 더 높을 것으로 생각했다. ‘태양의 도시, 공중 도시, 안데스의 신비’라는 수식어가 앞뒤 따지지 않고 마추픽추는 높은 곳이란 짐작을 하게 했나 보다. 화려한 수식어에 속아 어림과 짐작으로 판단하여 입력된 정보는 나흘째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고산병이 나아야 마추픽추로 (올라) 갈 텐데…….’라며 쿠스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였다.


쿠스코는 해발 3310m, 마추픽추는 2400m이다. ‘그래, 마추픽추로 내려가는 거야!’ 마추픽추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며 편하고 빠르게 다녀오는 방법과 시간과 육체적인 고생을 담보로 저렴한 비용으로 다녀오는 방법이다. 마음 같아서는 로컬버스를 타고 나의 두 발로 그곳에 오르고 싶지만, 딸아이를 핑계로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고 마추픽추로 떠난다.

천장에도 창이 있어 안데스 산맥을 감상할 수 있는 페루 레일

새벽 4시경에 밴을 타고 쿠스코에서 오얀따이땀보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페루 레일을 타고 마추픽추의 마을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간다. 천장의 유리창과 시원스러운 크기의 창문이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안데스 산맥의 자연을 그대로 보여준다. 거침없이 솟아오른 산은 진폭이 큰 주파수의 파형을 그리듯 역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구름이 우리의 눈 아래에 있다. 지금 마추픽추로 ‘내려가고’ 있구나!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도착한 우리는 마추픽추로 올라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탄다. 가파른 경사의 오르막길이라 버스는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슬로 모션으로 바뀐 차창밖 풍경에는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숨을 헐떡이던 그들은 버스 속의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승리자의 미소다. 아이를 핑계로 편한 길을 택한 나는 조금 부끄럽고, 또 그들이 많이 부럽다.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선 탓인지 딸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마추픽추 입구 화장실에서 구토를 한다. 아이의 컨디션이 걱정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엄마, 중요한 장소에 왔는데 아파서 속상하고 미안해.”

아이는 마추픽추가 남미 여행에서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하나 보다.

“딸아 여행에서 중요한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야. 중요한 장소는 사람마다 달라. 엄마는 마추픽추보다 네가 더 중요해.”

아픈 와중에도 페루 전통 의상인 빨간 판초를 입고 억지로 웃는 모습이 안쓰러워, 되려 내가 미안하다. 아이의 걱정을 접어둔 채, 마추픽추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느라 신경이 곤두선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 후, 먼저 자리를 뜬다.


잉카인들의 옛 도시를 배경으로 라마가 풀을 뜯고 있다. 마추픽추보다 라마에 더 감동한 아이는 라마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아이의 표정이 밝다. 라마가 아이의 약인가 보다.

안데스의 험난한 산속에 있는 수수께끼 같은 도시를 보며 ‘대체 이게 가능한 일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책과 영상을 통해 학습된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려 했으나 아이의 컨디션 난조와 그로 인해 파생된 몇몇 감정의 부딪침으로 마추픽추는 우리에게 새로이 회자될 듯하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서 거짓말처럼 상쾌한 아침을 맞는다. 쿠스코에서 두통과 메스꺼움에 시달리며 보낸 밤들을 보상받은 기분이다. 오늘은 성스러운 계곡 투어를 하는 날이다.


우리를 태운 밴이 흙먼지 폴폴 날리는 길가에 차를 세운다. 거친 비포장도로 아래 남해 다랭이 마을의 논처럼 생긴 계단식 밭이 보인다. 짙은 살구색과 황토색이 어우러진 물에 언뜻언뜻 보이는 하얀색의 밭은 맛있게 구워진 쿠키를 쌓아놓은 듯하다. 바다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산속의 소금밭, ‘살리네라스’다. 정형화되지 않은 크기와 불규칙한 모양의 계단식 밭에 고인 소금물은 거센 바람에 잔잔하게 물결을 일으킨다. 거센 바람에 큰 파도로 답했을 바다를 추억하는 걸까. 마치 방파제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듯 언덕 위에서 소금밭을 내려다본다. 바다가 산이 되는 일은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는 일’처럼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이곳에서 일어났나 보다. 소금밭의 물을 손으로 찍어 먹고 짜다며 인상을 쓰는 아이에게 살리네라스가 이야기한다.

‘너도 잊지 마, 네가 무엇이었는지. 네가 어디서 왔는지.’



산속의 소금밭 살리레라스


성계투어 중 만난 페루


마추픽추를 다녀온 뒤부터 고산병이 나았다. 호흡은 여전히 가쁘지만, 두통과 메스꺼움이 사라졌다.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2020년 새해 첫날, 우리는 해발 5200m에 있는 무지개산, 비니쿤카로 향한다. 지구온난화로 만년설이 녹으면서 발견된 산이다. 힘들게 올랐는데, 짙은 안개로 무지개산을 보지 못했다는 여행자들의 이야기로 인해 긴장감이 더해지는 산이다.

에스(S) 자를 그리며 올라가는 길은 안개가 자욱하다. 비니쿤카에 들어서니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원주민들이 노란색 꽃가루를 뿌려주며 그들의 언어로 새해를 축복한다. 새해 첫날, 원주민들의 축복이 감사하다. 비니쿤카 초입에서 정상 아래까지 걸어가거나 말을 타고 가야 하며, 정상으로 향한 마지막 오르막은 걸어가야 한다. 워낙 고도가 높은 지역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말을 타고 정상 밑까지 간다. 타고 갈 말이 없어 지팡이에 의지해 숨을 헐떡이며 산에 오른다. 조금 걷다 보니 말이 보여 아이 먼저 태워 보낸다. 또다시 걷는다. 남편은 숨을 잘 쉬지 못하는 나를 위해 말을 타려던 젊은 서양 남자에게 반강제적으로 말을 양보받는다.

 

새해를 축복해주는 원주민들, 그리고 안개 속의 산 비니쿤카

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벼랑 끝에 선 듯하다. 나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들어간다. 전통 의상을 입은 마부는 능숙하게 말을 끈다. 사람을 한 번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다시 산을 오른다. 마부는 신이 났지만, 말은 영 죽을 맛인 것 같다. 싫은 내색을 하며 코를 푼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비현실적이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산은 안개와 싸락눈이 흩날리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군데군데 하얀 눈이 덮여 있고, 눈이 녹은 자리는 짙은 밤색의 흙들이 질퍽거린다. 인색하게 덮여 있는 이끼처럼 보이는 풀들이 겨우 민둥산을 면하게 해 준다. 뿌연 안갯속에서도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하얀색으로 선명하다. 흐르는지 아니면 얼어서 하얀지 구별되지 않는다.


이 정도의 풍경을 본 것도 감사하다. 안개가 짙어 산에 오르고도 못 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만나 함께 산을 오르려는데 얼굴이 심상치가 않다. 황달에 걸린 듯 얼굴이 누렇다. 비니쿤카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구토를 해대던 아이는 무지개산을 보겠다며 아픈 내색을 하지 않고 5000m까지 올라왔다. 채 200m도 남지 않았는데...... 울 것 같은 표정의 아이를 달래어, 등산하지 않는 일행에게 맡겨두고 혼자 산에 오른다. 남편은 말을 타지 못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가족을 대표해서 무지개 산을 봐야 한다는 사명감이 나의 등을 떠민다.

정상까지 가는 방법은 하나다. 쉬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쉬지 않으려면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한다. 이곳은 해발 5200m이다. 산소가 부족하다.

무지개 산은 퇴적암의 침식작용이 선물한 것이다. 아이를 위해 인증사진을 찍고 산 아래를 보니, 큰 새 한 마리가 계곡 쪽에서 날아온다. 콘도르라 믿고 싶다. 이곳은 페루니까.




아이는 산소통으로 호흡을 한 후, 다시 말을 타고 하산을 한다. 지친 듯 타박타박 걸어가는 말과 그 위에서 말과 함께 흔들리는 빨간 판초의 아이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그림 같다. 저 풍경 속에는 아이의 고통은 보이지 않고 아름다움만 남아있다. 나도 모르게 위험을 무릅쓰고 말고삐를 잡은 손을 놓으며 핸드폰을 꺼낸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아이가 아픈데 사진만 찍는다며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을 쏟아냈던 내 모습이 찍힌다.


딸아, 너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무심하게 아름다운 풍경과 그 풍경을 보며 사진을 찍어대는 철없는 엄마, 아빠를 용서해다오.


산소통의 도움을 받아 호흡을 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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