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의 여행 Oct 01. 2022

산으로 올라온 바다

페루 푸노,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해가 뜨지 않은 하늘이 밝다. 빛이 없는 밝음은 창백하구나! 

한낮의 태양빛 아래에서 파리했던 백색 건물은 새벽의 여명 속에서 오히려 빛이 난다. 볼리비아 홉 버스가 아레키파 시내를 벗어나자 날카로운 빛이 차창을 뚫고 들어온다. 마치 하늘이 땅속에서 황금빛의 검을 뽑아 나를 향해 겨누는 듯하다. 

버스는 아레키파 외곽의 주유소에 정차한다. 우리는 급한 볼일을 보고 버스에서 먹을 아침과 점심을 사야 한다. 으레 이곳에서 홉 버스의 여행자들을 상대하는 듯, 노점상이 늘어서 있다. 포장도 하지 않은 채 돌무더기처럼 쌓아 놓은 빵, 낯선 과일들이 이국적이다. 여행자들은 쫓기듯 허겁지겁 요깃거리들을 쓸어 담는다. 

새벽 일찍 서두른 탓인지 졸리다. 아이는 내 다리를 베개 삼아 누워 잠이 들었다. 버스에서 자는 것이 익숙해져, 의자에 바로 누워 다리는 자연스럽게 꼬아 차창에 기댄다. 나도 아이와 함께 잠이 든다. 아이는 불편한지 뒤척이고, 그 움직임에 잠이 깬다. 버스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볼리비아 홉을 타는 여행자들, 페루와 볼리비아를 오가는 버스다


잠에서 깬 여행자들은 부스럭거리며 각자의 식사를 준비한다. 아이와 남편은 사과로 허기를 때우고, 난 돌무더기처럼 쌓아 놓은 곳에서 가져온 돌덩이 같은 빵을 먹는다. 허기 때문인지 짭짤한 빵이 입맛에 맞다. 

창밖의 풍경은 하나의 영상을 반복 재생하는 듯 변함이 없다. 빈 들판이다. 풀도 없는 거친 들판이다. 유럽풍의 건물이나 전통의상을 입은 원주민들 못지않게 이국적인 풍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는 광활한 빈 들판. 

버스를 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뻑뻑한 빵을 먹으며 목이 메어도 물을 마시지 않았는데. ‘으아~~ 내가 오늘 이러다 개망신당하지...... 이, 이, 이보게 기사 양반, 차를 세우시오~~ 냉큼!’ 

저 멀리 허허벌판에 뜬금없이 건물이 서 있다. 버스가 서자마자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 곳을 향해 달려간다. 아무리 바빠도 1솔(페루 화폐 단위)은 들고뛰어야지. 1솔을 내밀자 곱게 접은 누런 화장지를 건네는 아저씨에게서 낚아채듯 화장지를 받고 문으로 뛰어든다. 들어갈 때는 지옥이었으나, 나올 때는 천국이다. 살아남기 위해 온몸을 비비 틀던 전쟁 같은 시간이 지나고 평화의 시간이 왔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이 너그러워진다. 

허허벌판에 서 있는 식당과 화장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선배 여행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구간을 지날 때 허허벌판에 버스를 세우고, 남자들은 버스 앞으로, 여자들은 버스 뒤로 흩어져 각자의 급한 볼일을 보았다고 한다. 볼리비아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이 넓은 치마폭을 펼치며 우아하게 앉아서 볼일을 보는 모습을 보며, “여보~ 저 치마를 구해줘~”라며 소리쳤다는 말을 듣고 웃은 기억이 난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화장실과 간단한 스낵바가 우뚝 선 이유로 충분하다.

근심을 털어내고 나니 시선이 멀리 간다. 물이 보인다. 출렁이는 저 물이 있는 곳으로 가리라.

홉 버스는 페루의 국경도시 푸노에 우리를 내려준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그곳에 있는 호수, 띠띠카카가 있는 곳이다. 

우리를 태운 배는 토토라 갈대숲 사이를 해치고 나아간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토토라 갈대로 배를 만들고, 토토라 갈대로 섬을 만들고, 집을 만들어 지금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토토라 갈대로 만든 우로스 섬에 오른다. 여행자들을 위해 관광 상품화된 모습의 섬이다. 전통의상을 입은 원주민들은 토토라 갈대로 섬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고, 기념품들을 판다. 기념품 가게 앞에서는 늘 난감하다. 배낭여행은 작고 가벼운 기념품조차 결국엔 나의 어깨를 짓누르는 돌덩이가 될 것을 알게 하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어쩌면 세상엔 전쟁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토토라 갈대로 만든 섬이기에 푹신하고 출렁이는 물을 따라 출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섬에 발을 딛는 순간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자의 오만임을 알게 된다. 우로스 섬은, 그곳에 사는 이들에겐 단단한 육지보다 더 안전해 보인다. 아이는 우로스 섬에서도 강아지에게 정신을 빼앗겨, 섬은 보지 않고 있다. 어른은 눈으로 섬을 보고, 아이는 강아지와 뛰어다니며 몸으로 섬을 느끼고 있다. 여행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임을 아이에게 배운다.


기념품을 만드는 원주민과 우로스 섬의 기념품들


우로스에서 보낸 한 나절


푸노 아르마스 광장에는 바티칸에 본사를 둔 프랜차이즈처럼 성당이 있다. 익숙한 듯 성당 앞을 지나쳐 식당을 찾아 시내로 향한다. 제대로 된 밥을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하루가 다 가버렸다. 여행 중에 아이에게 제일 미안한 일은 끼니를 챙겨주지 못하는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사과와 비스킷을 먹었다. 어떤 날은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로 허기를 때우다 저녁 8시가 넘어 밥을 먹은 적도 있다. 어른이 굶는 것은 괜찮으나 아이가 굶는 것은 어른의 잘못이기에, 오늘도 나는 아이에게 미안하다.

푸노의 숙소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에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다. 무거운 배낭은 로비에 있는 짐 보관실에 둔 채, 간단한 세면도구만 챙겨 3층의 우리 집으로 간다. 여행 중에는 하루를 묵어도 그곳은 우리의 집이다. 


띠띠카카는 페루와 볼리비아에 둘러싸여 있다. 홉 버스는 페루 국경에 우리를 내려준다.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갈 수 없다. 배낭을 앞뒤로 메고 페루 땅에서 볼리비아 땅으로 걸어간다. 나라의 경계를 걸어서 넘어가는 경험은 처음인 탓일까? 짜릿하다. 국경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아이는 황량한 국경의 풍경을 찍어대는 나를 보며, 대체 뭐 볼 게 있어 찍냐는 표정이다. 국경의 마을에서는 솔(페루 돈)과 볼(볼리비아 돈)이 함께 통용되고, 말도 사람의 모양새도 같다. 이곳이 볼리비아 땅이라고 말해주는 건 띠띠카카 호수의 배에 달려 펄럭이는 국기가 전부다.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

볼리비아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핸드폰 시계의 시간이 1시간 빨라졌다. 버스도 가이드도 바뀌어 있다. 자연이 만든 것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만든 것은 ‘made in 볼리비아’ 다.

볼리비아 코파카바나의 띠띠카카 호수에 있는 태양의 섬으로 간다. 코파카바나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배는 태양의 섬 입구에 우리를 내려주고, 트랙킹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태양의 섬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갑자기 아이가 “엄마 나, 못 가겠어.”라며 소리친다. 뒤에 오는 남편을 믿고 앞사람을 따라 섬에 오른다. 남편은 아이와 먼저 도착점에 가 있겠다며 큰 소리로 말한다. 일행 중에 한국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눈에 익은 얼굴이 없다. 같은 배를 타고 온 일행인 듯한 무리를 따라 걷는다. 물도 돈도 남편에게 있다. 화장실도 갈 수 없다. 함께하지 못한 남편과 아이를 위해 인증 사진을 찍을 때만 걸음을 멈춘다. 섬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내 고향 남쪽 바다의 풍경이다. 화려한 의상의 원주민만 없다면, 남해와 통영의 풍경이라 해도 될 정도다. 가파른 길을 쉬지 않고 걷는데 몸이 가볍다. 숨이 가쁘지 않다. 여행하는 동안 체력이 좋아진 것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든다. 코파카바나 태양의 섬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허가증을 받은 듯 기분이 좋다.

호수라고 믿기 힘든 풍경이다


태양의 섬,  벽돌을 만드는 주민들
남해 다랭이 마을 같다

홉 버스를 타려는데, 쿠스코에서 같은 도미토리에 묵은 한국인들이 온다. 태양에 섬에 가지 않고 카페에서 쉬었다고 한다. 순간, 볼리비아 태양의 섬이 한국인 <여행 자제> 지역이라는 것이 생각난다. 아이가 평소답지 않게 ‘가기 싫다’며 소리친 것이 감사하다. 아이와 함께 섬에 올랐다면, ‘한국어’로 이야기하며 섬을 돌아다녔겠지.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겠지만, 한국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에 자칫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해발 3810m에 위치한 띠띠카카 호수는 지축이 순식간에 기울면서 바다가 산 위로 올라온 것이라고 한다. 띠띠카카 ‘호수’라고 학습되어 글과 말로는 ‘호수’라 칭하고 있으나, 나의 모든 감각은 ‘호수’가 아닌 ‘바다’를 느낀다. 이틀을 달려도 버스와 나란히 달리는 호수의 크기에 압도당해 나의 감각이 오작동한 것일까. 배를 타고 바다, 아니 호수로 나가자 ‘물’은 바다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파도치고, 물빛은 내 고향 남해바다의 빛깔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바람만이 짠 내를 찾지 못한 채, 나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있다. 띠띠카카 호수 너머로 만년설이 쌓인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홉 버스는 안데스 산맥을 넘고 띠띠카카를 건너 라파스로 달려간다. 

페루 사람과 볼리비아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그들은 띠띠카카 호수의 사람들이다.


이전 08화 백색 도시의 반전 매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