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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Oct 01. 2022

백색 도시의 반전 매력

페루 아레키파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던 나태주 시인의 말은 참말이다. 오래 머물러 사랑스러워진 쿠스코.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뒤로 밀려 사라지는 쿠스코의 거리를 본다. 해가 지는 거리에 불이 하나둘 켜진다. 따뜻한 쿠스코의 불빛 아래로 중절모를 쓴 할머니가, 배낭을 멘 여행자가, 연한 커피색 피부의 젊은이가 지나간다. 차창 너머 불빛은 물에 떨어진 물감처럼 창문에 부딪히는 빗줄기를 따라 번져간다. 울고 싶은 아이 때리듯, 때맞추어 내리는 비는 쿠스코와의 이별을 더 감상적으로 만든다. 쿠스코에서의 날들이 뿌옇게 흐린 차창 밖 풍경처럼 흐려진다. 쿠스코 안녕!


볼리비아 홉 버스는 밤을 달려 옅은 여명이 퍼지는 아레키파에 우리를 내려준다. 볼리비아 홉 버스는 페루와 볼리비아를 넘나드는 투어 버스로 on & off 방식으로 운영된다. <페루 쿠스코-볼리비아 라파스> 노선을 선택한 우리는 쿠스코에서 라파즈로 가는 동안 거쳐 가는 도시 중 원하는 곳에 내려 여행을 즐긴 후 그 노선을 따라 오가는 볼리비아 홉 버스를 타면 된다.


아레키파의 콜카 캐니언 투어를 하면 콘도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투어다. 쿠스코에서 아레키파까지 야간 버스로 이동해 왔는데, 또다시 새벽 4시에 투어를 가는 것은 무리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힘들어 못 하겠다. 투어 후기를 보니, 콘도르를 보는 것도 복불복이라고 하니 미련이 덜 남는다.

도시가 깨어나지 않은 까닭일까? 새벽의 여명이 무채색 건물에 스며들어 도시 전체를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있다. ‘백색의 도시’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도시 전체의 건물 색이 회백색이다. 아레키파의 대부분 건물이 하얀 화산암으로 지어져 도시 전체가 하얗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볼리비아 홉 버스가 도착했으니, 이제 배낭을 멘 여행자들이 아레키파를 깨우겠지. 우리도 야간 버스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잠든 숙소의 문을 두드린다. 2차선 차도에 위치한 평범한 건물이다. 간단한 조식이 포함된 가격이 저렴해 선택한 숙소라 ‘기대’라는 단어조차 생각하지 않고 들어선다. 길지 않은 복도 끝에서 밝은 빛이 들어온다. 빛이 시작된 곳에 발을 딛는 순간 21세기에서 17세기 유럽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하다. 중정이다!


아담하지만 아름답다. 노란색 바탕에 흰색이 칠해진 벽, 빨간 문, 벽에 달린 등, 이층 테라스, 흔들의자, 삼단 분수대 그리고 분수대의 물을 먹고 있는 새들. 키 큰 선인장 화분이 아니었으면, 중세 유럽의 정원이라 착각했을 것이다. 무채색의 건물이 품고 있는 원색의 중정이 주는 반전 매력에 잠이 확 달아난다.

산타 카탈리나 수도원의 입구를 찾아 회백색의 담을 따라 걷는다. 페루에서 가장 큰 종교 건물이라는 명성답게 높은 담이 둘러싸고 있는 큰 건물은 화강암의 투박한 흰색과 거친 질감이 더해져 위압감을 준다. 큰 건물에 비해 턱없이 작은 창문과 두꺼운 벽은 수녀원의 폐쇄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높은 담과 큰 건물이 만들어 낸 그늘을 따라 걷다 아치형의 입구로 들어선 순간 한꺼번에 쏟아지는 햇빛이 눈을 찌른다. 현기증이 날 만큼 부신 빛이 눈에 익자 파스텔 톤 색 회랑이 눈에 들어온다. 좁은 골목을 돌아가면 회랑이 나오고, 회랑을 따라가다 보면 수녀님들이 지내던 숙소나 도서관 예배당, 생활관, 카페 등이 나온다. 부엌, 목욕탕, 창고 등 생활에 필요한 각각의 장소들이 있다. 수도원 안에 작은 마을이 있다더니,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곳곳에 정원이 있고 꽃나무들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아름답다. 골목 쪽으로 난 벽에는 화분이 걸려있고, 햇빛이 비치는 벽 아래에는 어김없이 꽃들이 있다.



어두컴컴한 건물 안을 들여다보니, 천장과 바닥에 같은 크기의 하얀색 동그라미가 있다. 두 개의 하얀색 동그라미는 일직선에 있다. 하얀색 동그라미에 아이를 세우니 마치 불 꺼진 연극 무대에서 주인공에게만 핀 조명을 비춘 것 같다. 천장에 난 구멍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바닥에 그대로 내리 꽂히고 있다. 화덕이 있는 것을 보니 부엌인가 보다.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건물에 일정하지 않은 방향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수도원은 모든 장소가 사진 스폿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예쁘다.

회백색의 높은 담과 건물 속에 세련된 색감의 감각적인 마을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문득, 언젠가 가톨릭 재단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스승의 날 수녀 선생님께는 화려한 색의 속옷을 선물했다고. 수녀님들이 유일하게 멋을 낼 수 있는 옷은 속옷뿐이라, 화려한 속옷을 즐겨 입으신다고. ‘수녀님 저의 불경스러운 기억력을 눈감아 주소서.’

“너무 예뻐!”라는 말을 자꾸 하게 되는 산타 카탈리나 수도원 역시 아레키파의 반전 매력이다.

 

수도원에서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는 길에 아레키파 대성당 건물 벽을 따라 걷는다.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대성당과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상점가의 회랑이 어우러져 마치 중세 유럽의 성에 온 느낌이다.

아르마스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야경을 즐긴다. 아르마스 광장의 건물들은 불을 밝히고 있는 게 아니라, 건물 속에 가득 찬 불덩어리가 창문과 건물의 작은 틈을 통해 퍼져 나오는 느낌이다. 깜깜한 밤, 활화산에서 용암이 흘러내리듯. 환하게 켜진 불이 아니라 운치 있다. 은은하고 점잖게 퍼져 나오는 대성당의 불빛과 달리 경망스럽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에 거슬린다. 깜박거리지만 않아도 좋으련만.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문도 알파카(Mundo Alpaca)’로 향한다. 알파카에게 풀을 먹여주며 활짝 웃는 아이다. 여행 중 아이를 웃게 하는 것은 언제나 동물들이다. ‘문도 알파카’에는 알파카 털로 실을 만들고, 그 실로 베를 짜는 모습을 옛 방식대로 시연한다. 색색의 실들이 진열되어 있고, 원주민 한 명이 전통의상을 입고, 베를 짜고 있다. 마치 베를 짜는 인형이 전시된 듯 시종일관 같은 표정으로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우리가 그 원주민에게 잘못하는 느낌이 들어, 오래 있기가 불편하다.



아레키파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야나후아라 전망대에서 망중한을 즐긴 뒤 다시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한다. 광장에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여행자는 찾아볼 수 없는 저들만의 축제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난 이곳에 있고 싶다. 남편은 무슨 행사가 몇 시에 시작될지도 모른 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반대한다. 각자 하고 싶은 것을 즐길 시간이다. 이곳에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남편은 떠난다. 핸드폰이 없으니 이제는 연락 두절이다. 아이는 페루 아이들과 비눗방울 놀이를 즐기고 솜사탕을 사 먹고, 공놀이를 한다. 옆자리의 젊은 페루 여인들은 동네 친구들인가 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는 각자의 아이들이 함께 노는 것을 보며 웃음을 나눈다. 어두워진 광장에 불이 켜지며 말을 탄 가장행렬이 들어온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가장행렬을 향해 달려간다. 딸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아이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묻혀버린다. 아이가 사라지고 없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다. 아이를 찾아 자리를 뜬 사이 아이가 날 찾아오면 어떡하지? 어두워졌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게 된다.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은 채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옆자리의 페루 여인이 나를 잡더니, 스페인어와 몸짓으로 자기가 딸아이를 찾아보겠다며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미소 지으며 돌아온 여인은 군중을 가리키며 저곳에 아이가 있으니 안심하라고 몸짓으로 말한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춤을 추며 신나게 놀고 있다. 낯선 이방의 여인을 껴안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마음이 따뜻해진다. 고작 4시간 정도를 같이 보낸 사이인데, 오래된 친구 같고, 동생 같다. 그들에게도 동양인 모녀와의 만남이 특별했나 보다.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의 그들이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어 핫스팟으로 전송을 해 준다.

먼저 떠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데, 갑자기 꼬마 아이가 나에게 달려오더니 나를 와락 껴안으며 얼굴에 볼 뽀뽀를 한다.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볼 뽀뽀에 울컥 눈물이 쏟아진다. 꼬마의 볼 뽀뽀는 나의 피부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더니 나의 뇌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아레키파에서 아니, 여행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다.

백색의 도시 아레키파의 가장 큰 반전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고작 4살 꼬마가 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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