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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Sep 29. 2022

평범한 일상을 허락한 특별한 여행지

페루  쿠스코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 그래, 그렇게 사막엘 가자...’

페루에 사막이 있다는 사실을 페루에 와서 알았다. 사막으로 갈 수 있다는 말에 리마 숙소에 큰 짐을 맡겨둔 채 작은 가방만 들고 길을 나선다.

이카 사막의 오아시스, 와카치나 마을에 도착하니 낙타는 없고 버기카가 있다. 낙타 등이 아닌 버기카에 오른다. 놀이동산에 온 듯 버기카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보드에 엎드려 가파른 모래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간다. 모래에 누워 하늘을 보고, 데굴데굴 구른다. 어린 시절에도 해 본 기억이 나지 않는 행동들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래로 샤워를 한다. 뒤처리 걱정을 잊은 채 현재를 즐겨본다.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일탈이다.


사막에 앉아 해지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낙타가 없어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 위로받는 듯하다. 슬플 때면 석양이 보고 싶다던 어린 왕자 생각이 난다. 사막에 온 모든 이들이 모래 언덕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이 만들어 놓은 사막의 능선이 부드럽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가던 시선은 사막과 하늘이 맞닿은 곳에 머무른다. 관능적이다. 마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몸을 보는 듯하다.


고작 반나절 사막과 놀았다고 샤워를 해도 머릿속에서 모래가 나온다. 고작 하룻밤 사막의 천막에서 잠을 잤는데, 밤새 천막을 흔들어대던 사막의 바람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고작’에 불과한 그 시간의 조각들이 사막의 모래처럼 내 속에 쌓이고 쌓여 그리움의 산을 만드나 보다.


사막, 오아시스 그리고 버기카

이제 사막을 떠나 쿠스코로 가야 한다. 쿠스코로 가는 방법을 고민한다. 18시간 버스를 타고 가며 서서히 고산에 적응해야 하는지, 아니면 리마에서 비행기로 이동해 하루를 쉬는 게 나은지. 장거리 버스에 지치고 시간을 뺏기기보다, 편히 가서 쉬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인다. 멕시코시티에서 산 크리스토발까지 16시간 장거리 버스의 기억을 잊지 않은 탓이겠지.


쿠스코의 고도는 안데스 산맥 해발 3,310m다. 고산병이 걱정되어 약을 챙겼음에도 무슨 고집인지 약이 먹기 싫다. 일단 부딪혀보자는 심산이다. 고산병이 안 올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어 보기로 한다.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은 천막으로 덮여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행사의 일환인 원주민들의 노점상이다.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려고 원주민과 관광객들이 한데 얽혀있는 처마로 뛰어든다.

리마와 달리 이곳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양 갈래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에 중절모를 쓰고, 무릎 정도 오는 길이의 주름이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는 잉카의 여인들, 수술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쓰고, 화려한 문양의 옷을 입은 여인들, 귀를 덮는 모자를 쓴 아이들, 판초를 걸친 남자들, 화려한 색상의 전통의상을 입은 잉카인들을 보며 드디어 우리가 상상한 페루에 왔다는 생각에 들뜬다.


비 때문인지 원주민들 사이로 들어가자 다소 역겨운 냄새가 난다. ‘괜찮아 참을 수 있어. 코는 금방 적응할 거야.’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냄새 때문인가?


쿠스코의 크리스마스 야시장,

말로만 듣던 고산병으로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보내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하루 반나절이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다. 걸을만해 나선 저녁 산책길, 야경이 아름답다. 따뜻한 불빛을 보며 아이가 환하게 웃는다. 쿠스코가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 남편과 아이가 괜찮아 다행이다. ‘만약 셋 중에 누군가 한 명 아파야 한다면, 내가 아픈 게 제일 나아.’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선물인지.

쿠스코의 야경


대부분 여행자는 쿠스코에서 마추픽추, 성계 투어(성스러운 계곡이라 부르는 친체로, 모라이, 살리네라스, 오얀따이땀보를 둘러보는 투어), 비니쿤카, 팔코요 등으로 투어를 간다. 투어는 외곽으로 나가야 하기에 이른 새벽에 출발한다. 새로 옮긴 숙소는 아르마스 광장 근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다. 우리 방은 8명이 함께 지낼 수 있는 혼숙 도미토리다. 도미토리는 새벽부터 부산스럽다. 8명이 묵는 숙소이기에 매일 누군가는 새벽에 투어 길을 나선다. 여행자 대부분 투어를 하기에 새벽의 부산스러움에 너그럽다. 밤이 되면 투어에서 돌아온 여행자는 한껏 격앙되어 그곳에서의 감동을 쏟아낸다. 현지의 날씨 정보를 다른 여행자들과 공유한다. 12월의 쿠스코는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투어 장소의 날씨에 민감하다.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못 보기도 하고, 업-다운을 하는 기온 탓에 추위에 떨거나 더위에 지치기도 한다.

남미 여행자들은 비슷한 루트로 이동하기에 자신들이 지나온 여행지의 정보를 주고받는다. 같은 이유로 다른 나라에서 만난 여행자를 다시 만나기도 한다. 우리도 쿠바 아바나에서 같은 숙소에 묵었던 여행자를 쿠스코에서 다시 만났을 때 피붙이를 만난 듯 반가웠다. 배낭여행자들은 정보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주고받기도 하고, 배낭의 무게를 줄이려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혼자 온 여행자들은 간혹 마음 맞는 여행자를 만나면 일정 장소나 시간에 같이 여행을 하기도 한다. 배낭여행자들 사이에는 캐리어를 들고 호텔에서 묵는 여행자가 느낄 수 없는 끈끈함이 있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는 이유로 우리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딸아이는 게스트하우스 마당에서 언니, 오빠들과 보드게임을 하기도 하고, 다른 여행자들이 보는 태블릿의 영상을 어깨너머로 보기도 한다. 아이는 숙소에서 친해진 일본인 언니 둘과 헤어지는 날 서로 껴안으며 헤어짐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아이를 조카처럼 챙겨주는 여행자들 덕분에 남편과 둘이 산책을 나선다. 두통은 약해졌지만, 호흡은 여전히 가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밤에도 아름다운 아르마스 광장! 눈여겨봐 둔 카페에서 차 한 잔의 여유도 가져 본다.


산 페드로 시장 가는 길, 쿠스코의 골목

리는 틈만 나면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주변을 창원의 우리 동네처럼 돌아다닌다.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뻗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시장이 나오고, 2층 테라스가 예쁜 카페가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쪽을 따라가다 보면 12각 돌로 유명한 돌벽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저 골목을 따라가면 장기 여행자들의 만병통치약 김치찌개를 파는 한식당이 나오겠지. 알파카 스테이크 맛집은 어느 골목으로 가야 하지?’ 모퉁이를 돌아가니 독특한 전통의상을 입은 원주민 여성들이 라마를 안고 햇볕을 쬐며 사진을 찍을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다. “맛싸헤?” 하며 호객행위를 하는 순박한 미소의 아가씨 손에 이끌려 들어간 마사지숍은 쿠스코에 머무는 동안 단골이 되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오르다 쿠스코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고, 게으른 걸음으로 내려와 아르마스 광장에 앉아 해바라기를 한다. 기념품 가게 앞에서 인디언 추장 머리 장신구를 쓴 원주민은 팬 플롯으로 <엘 콘도르 파사>를 연주하고,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로 가 CD 음반을 산다. 한국에서 듣게 될 <엘 콘도르 파사>는 우리를 이곳의 시간으로 소환하겠지.

아르마스 광장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중절모에 재킷을 걸치고 풍성하지만 짧은 치마를 입은 할머니, 햇볕에 탄 짙은 고동색 얼굴로 공을 차는 아이들,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보자기로 묶은 뒤 무거운 짐을 들고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아줌마, 그 뒤를 총총걸음으로 따라가는 아이. 쿠스코에 오면 하나씩 산다는 페루 전통 망토를 입고 귀를 덮는 모자를 쓴 여행자들이 광장 곳곳에서 원주민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우리도 지금 아르마스 광장의 풍경이 되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일이면 2020년이다. 쿠스코를 언제 떠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페루에서 볼리비아로 가야 한다. 볼리비아는 비자가 있어야 입국할 수 있기에 새해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볼리비아 비자 발급 여부는 복불복이다. 어떤 이는 한번 만에 또 다른 이는 두 번 세 번 방문하여 겨우 발급받기도 한다. 우리는 다행히 한번 만에 비자를 발급받아 홀가분하다.

크리스마스부터 이어진 들뜬 분위기는 한 해의 마지막 날 절정에 이른다. 아르마스 광장은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새해의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 쿠스코 마을 곳곳에서 불꽃놀이를 하는지 산발적인 총소리가 들린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비가 왔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언제 왔는지 사람들 틈새로 비옷 장수는 비옷을 팔고 있다. 현지인들은 노란색 꽃가루를 뿌리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한 해를 축복한다. 페루인들은 노란색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다. 노란색 모자를 쓰고, 노란색 꽃목걸이를 하고, 노란 풍선을 들고, 노란색 속옷을 입는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 축제를 즐겨야 하는데도 비는 내린다. 내려야 할 비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린다. 여행 중이라도 삼시 세끼는 챙겨야 하고, 빨래는 해야 한다. 여행 중이라도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지금 여행과 일상 그 사이 어디쯤 있다. 쿠스코에서 우리는 여행을 일상처럼 즐기고 있다. 여행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면, 그곳에서도 일상을 여행처럼 즐길 수 있을까?



아르마스 광장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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