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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Sep 28. 2022

남미인 듯 남미 아닌 남미 같은

페루 리마

페루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페루를 나가는 티켓이 필요하다. 늘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여행을 해 왔던 터라, out-ticket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다. 떠나왔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여행은 왕복 티켓이 필요하지만, 또 다른 어딘가로 가야 하는 여행에서는 편도 티켓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 어떤 나라도 편도 티켓만 들고 입국을 할 수 없다. 가고자 하는 나라를 떠나는 out-ticket이 있어야 입국이 허가된다. 정확히 말하면 out-ticket이 있어야 그 나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태워준다. 언제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고 다니는 여행에서는 늘 out-ticket이 고민이다. 모든 일정을 고정해놓고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마음이 머무는 곳에서는 오래 머물고 싶고, 또 어떤 곳에서는 하루빨리 떠나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장기 여행자들은 24시간 안에 환불 가능한 티켓을 이용한다.

우리 역시 페루에서 얼마나 머무를지 알 수 없기에 환불 가능한 out-ticket이 필요하다. 페루 푸노와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국경도시를 오가는 버스가 있다. 4시간 정도 소요되며 1인당 요금이 대략 1만 2,000원 정도이기에 비교적 부담이 없다. 버스든 비행기든 국경만 넘어가면 되니까.


남미 여행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마추픽추의 나라 페루다. ‘하늘에는 콘도르가 날아다니고, 바람결에 El condor Pasa의 선율이 들릴지도 몰라. 잉카제국의 후예들은 과거를 응시하는 눈빛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 거야.’ 여행일 수가 늘어날수록 낯선 곳에 대한 설렘이 일상이 되어갈 무렵의 페루 여행은 우리를 다시 여행자로 되돌려 놓는다.


여행의 변수는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리마 공항에 도착한 뒤 현실을 직시하는 눈빛의 잉카제국 후예와 침 튀기는 택시비 흥정에 이어 매연이 가득한 도로에서의 교통체증이라니. 콘도르가 날아야 할 하늘은 뿌옇고, El condor Pasa의 선율은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삼켜버린다. 생각지도 못한 교통체증과 석양을 보기 위해 나온 산책길의 화려한 쇼핑몰이 리마의 첫인상이다. 남미인 듯 남미 아닌 남미 같은 페루 리마다.



리마의 야경, 미라 플로레스 해안가



  남편은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아르마스 광장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아르마스(Armas)는 스페인어로 중심 광장이다. 대부분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성당이나 주요 건물이 있어 사람들이 붐비고,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는 길 역시 교통체증으로 더디다. 오늘은 차가 꽉 막힌 도로가 싫지 않다. “엄마, 저기도 우리 차야!” “엄마, 저기 기아 대리점도 있어!” 도로 위의 차들 5대 중 1대꼴로 한국 자동차다. 리마의 꽉 막힌 도로에서 만나는 한국 자동차는 우리의 자부심이다.

아르마스 광장으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콜롬비아와 볼리비아의 유혈 사태가 진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지금 이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외국인이 경찰과 이야기하더니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도 여행자야. 들여보내 줘.” 말하는 사이사이에 마법의 단어 “뽀르 빠보르(Por favor:부탁합니다. 제발)”를 조사처럼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국민은 통제하고 관광객에게만 개방한 아르마스 광장은 여유롭다. 남미에서 조심해야 할 곳 중 손가락 안에 꼽히는 리마의 구시가지. ‘낮에만 관광 가능, 밤에는 절대 가면 안 됨’이라는 빨간 경고등은 사방에 깔려 있는 경찰 덕분에 잠시 잊어도 될 듯하다.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에 두고 대통령궁, 시청, 리마 대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리마의 아르마스 광장

아르마스 광장에서 산 마르틴 광장으로 가는 길목의 라 우니온 거리를 걷는다. ‘리마의 명동’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활기차고 자유롭다. 길을 걷다 마주친 사람과 수줍은 눈인사를 나누며 스쳐 지나가는 것이 여행의 재미다. 유명한 관광지의 건물들은 비슷해서 볼수록 감흥이 줄어든다. 대표적인 건물이 성당이다. 각 성당마다 특징이 있다고 하지만, 그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겠다. 마치 외국인이 우리나라 여행 와서 불국사, 송광사, 해인사를 가는 것과 같은 경우다.

산 마르틴 광장의 화단 턱에 걸터앉아 망중한을 즐긴다. 저글링 버스킹을 하는 사람, 큰 휴지통을 통째로 끌고 다니며 청소하는 사람, 비둘기를 쫓아 뛰어다니는 아이. 애써 보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사람이다. 저들의 일상을 보며 익숙한 장면에서 웃음이 터진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든 똑같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똑같으면 지겹고 재미없어야 하는데, 똑같아서 더 재미있다. 공감의 힘이다. 입장료를 내고 간 유명한 관광지에서 놓치지 않고 보기 위해 애쓰는 수고로움이 무색하다.



산마르틴 광장의 모습

 숙소 근처 마트에서 말도 안 되게 싼 가격에 산 망고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양도 많고 맛도 좋다. 너무 많은 양이라 함께 먹자며 모인 숙소 사람들과 망고를 안주 삼아 페루의 전통주 피스코를 마신다. 오가던 이야기 중 24시간 붙어있어야 하는 여행의 애로점을 토로한다. “같이 여행 왔지만, 가끔씩 따로 다니세요. 저희는 그렇게 해요. 같이 왔다고 늘 같이 다니면 피곤해요. 하고 싶은 것이 다를 때는 따로 움직이는 것도 괜찮아요.” 친구와 둘이 여행 왔다는 젊은 아가씨가 말한다.

남편은 예술의 거리 바랑코에 가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한다. 나는 패러글라이딩이 타고 싶다. 아이는 서핑이 하고 싶다. 그럼, 어제 그 친구의 조언대로 해보자. 남편은 바랑코로 떠나고, 아이와 난 패러글라이딩을 탄 후, 서핑을 하기로 한다. 패러글라이딩 신청을 하니, 기다려야 한단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음.... 1시간? 2시간? 어쩌면 오후 내내..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maybe'를 연이어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은 하늘 말고 바다로 가야지.

바다로 가는 길에 사랑의 공원이 있다. 사랑의 공원 조각상은 입을 맞추고 있는 연인의 형상이다. 조각상이 멋지지는 않지만 인상적이긴 하다. 어느 해 이곳에서 밸런타인데이에 키스 오래 하기 대회가 열렸는데 19시간 키스한 연인이 일등을 했다. 그 연인의 포즈를 조형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19시간 키스가 가능했던 것은 사랑의 힘이었을까, 승부욕이었을까?


사랑의 공원 모습,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 키스 조각상

 리마의 미라 플로레스 해변의 해안선은 아름답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 부서지는 하얀 파도 위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리마 해변을 더 돋보이게 한다. 영어로 진행되는 초스피드 서핑 강습을 듣고 바다로 간다. 내가 믿는 것은 보드와 내 발목을 연결한 생명줄이다. 보드에 엎드려 손을 열심히 저어 바다 깊숙이 들어간다. 강습에서 배운 대로 원, 투, 쓰리에 맞춰 보드 위에 서려는 순간 파도가 덮쳐 그대로 바다에 빠진다. 서핑 강사의 도움으로 겨우 보드를 잡는다.

바다에 빠지면서 내 장기가 바다처럼 출렁거렸나 보다. 아직 소화가 다 되지 않은 나의 점심이 벌컥거리며 마셔버린 짠 바닷물을 만나 파도치기 시작한다. 배 멀미다. 나를 육지로 내보내 줘요. 뽀르 빠보르... 베네수엘라 출신의 서핑 강사는 책임감 있게 1시간을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뽀르 빠보르.... 내가 나가자고 했으니 괜찮아요. 나를 이 바다에서 나가게 해 줘요. 이 깨끗한 태평양을 더럽힐 순 없어요. 국위 선양은 못할지언정 나라 망신을 시킬 수는 없어요. 뽀르 빠보르... 뽀르 빠보르.... 해변 몽돌 위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든다. “엄마~ 나 두 번이나 보드 위에 섰어요~” 아이가 흥분하며 뛰어온다. 딸아... 엄마는 나라를 스무 번쯤 구한 것 같다. 피곤하구나.

 

바랑코를 다녀온 남편은 표정이 밝다. 리마에서 제일 오래되고 유명한 커피숍에서 사 왔다며 커피를 내민다. 오는 동안 미지근해진 커피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커피의 온도가 마시기에 적당하다. 어쩌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당한 온도도 미지근한 커피의 온도 일지 모른다. 너무 뜨거우면 도망가고 싶고, 너무 차가우면 상처를 입는다. 오는 동안 식을 줄 알면서도 사 오는 비계산적인 감성은 뜨겁지 않아도 따뜻하고, 차갑지 않아도 시원하다. 미지근한 커피가 부드럽게 넘어간다.

내일은, 우리 사막으로 가자!


바랑코의 벽화와 마시기 적당한 온도의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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