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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Sep 28. 2022

스케치북 같은 도시

브라질 상파울루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브라질 상파울루까지 버스를 타자고 고집을 부린 건 나였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달려보고 싶었다. 끝없이 달려보겠다는 의지가 무색하게 버스가 아순시온 터미널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속이 울렁인다. 리마에서 서핑 멀미를 한 뒤, 차만 타면 멀미다. 자세가 조금만 바뀌어도 토할 것 같다. 이렇게 21시간을 가야 한다.

남미에서 20시간 정도 버스를 타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이곳에서 21시간 버스를 탔다고 말하면, “음, 그 정도는 약과지. 난 키토에서 리마까지 36시간 걸렸어.”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옆의 사람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엘 칼라파테까지 45시간이 걸렸는데 말이야...”로 시작하는 장거리 버스 탑승 무용담을 듣게 될 것이다.                                                                           

파라과이에서 브라질로 우라를 데려다 준 버스

21시간을 버스에서 대충 먹고 불편한 자세로 견딘 우리는 얼큰한 김치찌개 생각이 간절하다. 가자, ‘봉헤찌로’로~

<붕어 싸만코><뽕따> 그리고 <좋은 데이>로 행복해지는 이곳은 ‘봉헤찌로’다. 꽤 큰 규모의 한인마트와 은행, LG전자대리점은 물론 다양한 종류의 한식당들이 즐비하다. 김치찌개로 배부르고, 라면과 한식 재료로 배낭까지 두둑해지고 나니, 상파울루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높고 화려한 빌딩 숲, 드문드문 보이는 유럽풍 건물들, 정글에 있을 법한 크기의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도로의 차들 사이로 제복 입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지나간다. 건물마다 그려져 있는 벽화들은 도시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워있는 노숙자들이다.

버스정류소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해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다가오는 노숙자를 피해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사람들 사이로 숨는다. 이곳의 노숙자들은 여행 중에 만난 그 어느 노숙자들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브라질은 위험하다는 정보들이 덧대어져 생긴 선입견 인지도 모르겠다.

                                             

쎅 광장, 클래스가 다른 노숙자

<Hop on & off>로 진행되는 시티투어 버스를 탄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보드게임 부루마블에 등장하는 세계적인 도시를 수박의 겉핥기식으로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고, 버스를 타고 가다 마음이 끌리는 장소에 내려 몸으로 경험할 수 있으니 더없이 좋다.

빨간색 기둥 4개가 지탱하고 있는 건물이 눈에 띈다. 상파울루 미술관이다. 1968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가 74미터로, 건축될 당시 세계에서 기둥 사이가 가장 먼 건물이었다는 남편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건물을 본다.

버스에서 내려 상파울루 미술관의 기둥 사이로 걸어간다. 74미터의 건물은 자신의 덩치만 한 그늘을 만들어, 태양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미술관이 만들어 낸 그늘의 중심으로 들어가니, 4개의 기둥이 지탱하는 74미터 건물의 대단함이 피부로 느껴진다. 중심을 받쳐주는 기둥도 없다. 건물은 사진 한 컷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길다. 74미터 길이의 건물과 그것을 지탱하는 4개의 기둥을 보며, 보이지 않는 곳에 무수히 박혀있을 철근들을 생각한다. 중심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철근들이 서로를 깊이 껴안고 있을까. 무거운 철근들을 견뎌내기 위해 기둥은 또 땅 속으로 얼마나 깊이 내려갔을까.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는 상식이 책 속에서 나와 삶으로 들어온다.

한낱 건물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보이지 않는 콘크리트 속을 철근으로 채운다. 나의 삶에서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내 속 깊은 곳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삶의 화두를 던져 준 상파울루 미술관 빨간 기둥을 쓰다듬는다. 오브리가다!(고맙습니다)

                               

삶의 화두를 던져준 빨간 네 기둥의 건물
그늘에도 압도 당함

쎄 광장 주변에 노숙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과장을 좀 하자면, 관광객 반 노숙자 반이다. 광장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싶으나, 아이가 보지 않았으면 하는 장면들이 곳곳에 눈에 들어온다.

도심 안 광장에 생뚱맞게 정글에서 봄직한 나무가 서있다. 브라질에서 사라진 원주민을 만난 듯하다. 주인이 사라져 버린 땅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무다.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다른 아우라가 느껴진다.

광장 안 야자수 나무가 만들어 낸 길 끝에 상파울루 대성당이 보인다. 쎄 성당이다. 성당 안에서는 때마침 미사를 드리고 있다. 낯선 언어로 부르는 성가가 성당 안에 울려 퍼진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옆에 슬그머니 앉아 눈을 감는다. 저들의 기도에 우리의 염원을 살짝 얹어본다. 성당 밖 노숙자들이 만들어내는 음산한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하다. 성당 안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신의 보호를 받는 듯하다.  

이생진 시인은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고 하더니, 배트맨 마을에서는 한 뼘의 공간만 있어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더니, 배트맨 마을에서는 벽, 대문, 지붕, 길바닥 하물며 부서진 계단에도 천연스럽게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곳은 모든 것들이 그림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배트맨 마을에서 다양한 모습의 배트맨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펠레를 만난 배트맨, 형제의 키스를 패러디한 배트맨, 배트우먼, 하늘을 나는 배트맨 등 배트맨 마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그림들이 즐비하다. 배트맨 그림뿐 아니라 벽마다 그려진 그림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

베트남 마을의 벽화들

그림을 따라 마을을 다니다 보니 온 몸이 흠뻑 젖어 있다. 그늘을 찾아 들어간 공원의 벤치가 독특하다. 안락의자처럼 생긴 벤치를 보니 누워보고 싶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니 오늘은 이곳에서 산책 나온 동네 주민 놀이를 해본다. 의자 참 편하고 좋구나.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상파울루를 다니다 보니, 남미 최대의 도시라는 말이 실감 난다. 빽빽하게 들어 선 건물 숲이 갑갑하지 않고, 쇼핑몰 인파 속에서도 공간의 여유가 있다. 이비라푸에라 공원이라는 안내 멘트에 맞게 오벨리스크와 개척자 기념 조형물이 보인다. 그늘 한 점 보이지 않는 공원을 보자 내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몇몇 유명 관광지를 돌고 돌아 다시 쎄 광장이다.  

                                  

시티투어 버스로 스치듯 본 생파울루

상파울루 성당이 있는 쎄 광장을 보자 우리 셋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노숙자들이 많아 꺼려진다 말하면서도 이상하게 끌림이 있는 쎄 광장이다. 세 번째 방문이다. 광장 주변 길들이 눈에 익고 성당 안과 밖을 자유롭게 다닌다. 동상 앞에 누워 있는 노숙자를 보고도 피하지 않고 자연스레 지나간다. 거리에 누워있는 저들이 우리를 위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레 겁을 먹고 주춤거렸던 것이 불과 사흘 전이다. 위험하다는 경고의 빨간색이 바래지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속한 것은 스스로 지키라는 말을 ‘브라질은 위험해!’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파울루는 도시 전체가 스케치북 같다. 거대한 스케치북의 그림들이 모두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멋지고 잘 그린 그림이 아름답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잘 그린 그림이지만 얼굴이 찌푸려지는 그림도 있다. 누가 봐도 예쁜 그림이 있지만, 보는 이에 따라 불편한 그림도 있다. 스케치북을 넘길 때마다 그림 한 구석에 피하고 싶은 그림이 보인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던 그림을 계속 들이밀며 보라고 한다. 억지로 지워버릴 수도 있는 그림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파울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스케치북 같은 도시, 상파울루에서 오늘은 우리가 그림 한 점 되어 볼까 한다                                              

아이에겐 어디든 놀이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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