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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Oct 02. 2022

은하수를 품은 도시

볼리비아 라파스

“일어나, 저기 좀 봐!”

구겨진 몸으로도 깊은 잠에 빠져들 만큼 피곤했는지, 아니면 그만큼 장거리 버스가 익숙해졌는지 모르겠다. 버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옆에 앉은 남편은 다른 여행자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날 깨운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인데도 잠이 확 깬다. 놀람, 흥분, 감동이 응축된 목소리는 작지만, 힘이 센가 보다. 남편이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남편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들이 ‘쿵!’하고 나의 심장으로 떨어진다.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풍경은 덜컹거리는 버스를 따라 흔들리며 멀어지다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밀당을 한다. 차를 세우고 완전체의 풍경을 보고 싶다. 홉 버스 가이드는 불을 켜며 여행자들을 깨운다. 버스는 감질나게 애태우던 풍경 속에 우리를 내려놓고 떠난다. 라파스다. 풍경 속에 들어오니,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떠나버린 버스여 다시 돌아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오.’ 


흔들리는 버스안에서 찍은 라파스. 흔들리는 불빛보다 더 흔들려버린 내 마음



라파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로 평균 고도가 해발 3600m가 넘으며, 중심가는 3600m 정도에 있다. 볼(bowl) 모양처럼 생긴 라파스는 볼의 중심부인 아래쪽에는 해발 3200m로 대부분 부유층이 거주하고, 위쪽은 해발 4100m로 빈민층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한 도시 안에서 고도차가 900m가 난다. 900m라는 고도의 차이가 빈부의 격차를 말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돈이 부족해, 산소가 부족한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라파스를 설명하는 인터넷의 자료를 읽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사람을 자극한다. 

라파스에서 이틀을 머물다 우유니로 간다. 라파스는 우유니로 가기 위해 들른 징검다리 같은 도시다. 우유니로 가는 항공권과 우유니의 숙소도 예약을 마친 상태다. 우유니로 가는 날짜를 여유 있게 잡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야경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있어 다행이다.


여행의 변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른다. 

남편은 밤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비상약도 소용이 없다. 아이가 아니기에 내가 해 줄 게 없다. 걱정스럽게 지켜보는데, 조금 심각하다. 장거리 버스에 지친 몸을 위해 모처럼 호텔을 잡았는데, 침대에 누워보지도 못하는 남편을 보니 안쓰럽다. 도미토리였다면 죽이라도 끓여 먹일 텐데. 탈수가 오면 큰일이다. 

조식을 준비하는 시간이 된 듯해, 비상용 죽을 들고 호텔 로비에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한다. 호텔리어는 흔쾌히 나를 주방으로 데려간다. 그라시아스! 


죽을 끓여 먹였으나, 결국엔 병원으로

죽을 먹은 남편은 죽이 위에 채 닿기도 전에 화장실로 달려 아니, 기어간다. 민간요법으로 대처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괜찮아, 우리에겐 여행자 보험이 있으니까. 

택시를 타고 병원 가는 길에 흘기듯 본 라파스의 풍경은 같은 남미라도 쿠스코나 리마와는 다른 분위기다. 평지가 없다는 라파스. 나의 눈은 경사진 길들을 따라 올라간다. 저 멀리, 저 높이 집들이 빽빽하다. 우리나라 달동네 같다. 고도가 높은 곳에 밀집된 빈민촌이다. 

밤하늘의 은하수 같던 그 불빛들은 알고 보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만들어 낸 빛이었다. 높은 빌딩에서 쏟아내는 조명이 아니라, 태양 빛을 반사하는 별처럼 가물거리는 빛! 

라파스의 풍경이, 까마득하다


가물거리는 별빛처럼 힘이 없던 남편은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은 후 겨우 직립보행이 가능해졌다. 몸을 빨리 추스르기 위한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 장기 여행자들 사이에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처방전이 있다. ‘밥과 김치’ 여행 중엔 김치가 약이다.

한인 식당의 주인아주머니는 배를 움켜쥐고 꾸부정하게 걸어 들어오는 남편의 모습과 반쪽이 된 얼굴을 보시더니 몹시 안타까워하신다. 다른 이들에겐 주지 않는 따뜻한 숭늉을 주시며 먼저 속을 달래게 하고, 자극적인 김치보다는 된장찌개가 더 낫다 시며 메뉴에도 없는 된장찌개를 끓여 주신다. 엄마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사 선생님을 만난 듯하다.



장기 여행자들의 만병통치약, 한식!


라파스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라파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낄리낄리 전망대는 현지인들도 위험하다고 꺼리는 지역이다. 우리 세 식구만 가기도 무서운 곳인데, 야경을 보겠다며 아픈 사람을 끌고 갈 수도 없고, 혼자 갈 수는 더더욱 없다. 지금은 남편의 건강 회복에 집중할 때다. 

링거와 약, 그리고 된장찌개 처방 덕분에 남편은 이제 화장실을 들락거리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도 약을 먹으러 한인 식당에 간다. 아이는 메뉴판의 짜장면을 보더니 반색을 한다. 삶은 달걀과 오이채가 고명으로 올라가 있는 짜장면을 보니, 나도 반갑다. 

라파스에서의 2박 3일은 병원과 한식당의 다니며 다 써버렸다. 숙소가 성 프란시스코 성당 근처라 시장과 광장을 오가며 라파스를 조금 들여다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라파스 호텔 열쇠 좀 보소!  호텔 로비에서 놀고 있는 민주


라파스의 오르막 길, 숨 가쁘다
전신주의 전선줄만큼이나 복잡하고 심난했던 우리들


저 웃음에 녹아내렸네


우리는 지금 자유여행 중이다. 고정된 루트는 없다.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우리는 지금 다시 라파스로 가고 있다.

우유니에서 라파스까지 버스로 11시간이 걸린다. 야간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다. 처음 타는 까마 버스다. 남미 버스는 완전히 드러누울 수 있는 까마 버스와 반만 누울 수 있는 세미 까마 버스가 있다. 비싼 만큼 편하다. 


정말 편안했던 까마 버스, 돈의 힘


아침, 저녁을 한식으로 제공하는 한인 민박에 숙소를 잡았다. 민박집 근처에 달의 계곡이 있다기에 길을 나선다. 오래전에는 그냥 동네 뒷산이었는데, 달에 다녀온 우주인이 달과 가장 비슷한 곳이라고 한 이후부터 ‘달의 계곡’으로 불린다고 한다. 달에 가보지 않아 달과 비슷한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의 풍경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건조함과 삭막함이 느껴진다. 평평한 모래밭이 펼쳐진 사막이 아니라, 푸석해 보이는 질감의 모래 바위가 펼쳐져 있는 모래 바위 사막이라고 할까? 그늘이 보이지 않는 뾰족한 모래 바위의 계곡을 빠져나오니, 사막을 빠져나온 듯 몸도 마음도 푸석하다. 


달의 계곡, 보기만해도 푸석하다


우리를 다시 라파스로 끌어당긴 야경을 보기 위해 낄리낄리 전망대로 간다. 위험한 곳이기에 숙소 여행자와 동행하여 길을 나선다. 

낄리낄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라파스의 야경은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어둠은 빈민촌의 허름한 집들은 감추고, 그곳에서 스러지려는 삶을 잡고 있는 이들이 밝히는 빛을 드러낸다. 하늘과 별이 가까이에 있어서인지 한밤의 라파스는 하늘을 닮았다. 라파스는 밤이 되면 은하수를 품은 하늘이 되나 보다. 별과 별 사이를 밤으로 채운 우주가 되나 보다.


카메라에 다 담아내지 못하는 라파스의 야경

라파스에는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한다. 산소, 평지 그리고 벌레와 파충류. 우유니에서는 괜찮던 남편은 라파스에 오더니 다시 두통을 호소한다. 라파스에서만 고산 증세가 나타난다. 산소가 없다는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닌가 보다.

평지가 없는 라파스는 경사길로만 되어 있어 교통 체증이 심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 위에 길을 만들었다. ‘미 텔레페리코(Mi Teleférico)!’ 케이블카다. 총 11개 노선으로 운행되는 텔레페리코는 지하철과 비슷한 시스템이다. 



하루종일 라파스의 하늘 위에 있었다네

오늘은 하루 종일 텔레페리코다. 편도 운행료가 한화 500원 정도이니 부담도 없다. 텔레페리코를 타고 하늘을 누비며 라파스를 한눈에 내려다본다. 해발 4150m에 위치한 엘 알토에 내려 도넛과 손수레에서 직접 즙을 내주는 ‘나랑하쥬고(오렌지 주스)’로 점심을 대신한다. 엘 알토에 내린 이유는 ‘체 게바라’ 동상을 보기 위해서다. 이곳의 체 게바라 동상은 여태껏 보던 동상과 사뭇 다르다. 철로 만든 동상이다. ‘철’이라는 소재 탓인지, 폭탄을 온몸에 두르고 적진을 향해 걸어가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체 게바라’가 마지막으로 활동하다 사망한 곳이 볼리비아라 그런지, 동상은 보는 이를 비장하게 만든다.

남미는 어딜 가나, CHE!



한밤의 텔레페리코는 우리를 동화의 세계로 데려간다. 라파스의 어둠은 더 짙게 내려앉은 어둠과 모래처럼 뿌려진 황금의 별 가루들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코코’ 영화 속 죽음의 세계에 나오는 케이블카를 탄 채 날고 있는 기분이다. 잔혹함은 덜어내고 정형화된 교훈만 드러낸 전래동화 같다. 그래도 라파스는 아름답다. 아름다워 더 먹먹해진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텍쥐페리의 말이 생각난다. 라파스가 아름다운 건 어둠 속에서도 삶의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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