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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재손금 Nov 02. 2024

단속의 아이러니: 정의의 대가

무허가 위험물 단속 이야기

친구야, 들어봐.

이번에는 ‘단속’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게.

소방서에서 인허가를 담당하는 유일한 행정 업무는 바로 위험물 저장 취급에 관한 거야.

위험물은 화재나 폭발의 위험성이 큰 인화성, 폭발성, 산화성, 가연성 등의 성질을 가진 물질을 말해.

휘발유나 경유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것도 있고, 영화에 나오는 TNT 같은 것도 위험물에 해당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말 ‘위험한’ 물질들이지.




내가 근무하는 소방서 관할에는 굉장히 큰 공업단지(이하 '공단')가 있는데, 이곳에서 제조되는 물품들은 다양하지. 그중에서도 화장품 제조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해. 들은 바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화장품의 절반 가까이가 이 공단에서 만들어진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친구야! 화장품 제조에도 위험물이 원료로 사용된다는 거 알아? 우리나라 위험물 안전관리법에서 지정한 위험물 가운데 제4류 위험물들이 화장품 원료로 사용돼.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지? 에탄올, 이소프로필 알코올, 아세톤, 과산화수소는 들어봤을 거야. 이 물질들이 화장품 원료로 쓰이는데, 인화성(불이 붙는 성질)이 강해서 주의가 필요해. 화장품 제조 공장에서는 공장 건물 밖이나 안전한 장소에 저장소를 따로 마련해 이런 위험물들을 보관하고 취급해야 해.


이렇듯 공단에서는 제조하는 물질의 원료로 위험들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위험물과 관련된 화재가 빈번히 발생하고, 한번 불이 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재산 피해도 막대하지. 불을 끄는 소방관들도 큰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래서 소방서에서는 평소에 화재 예방 차원에서 내근(행정) 근무를 하는 소방관들이 무허가 위험물 단속을 많이 해.


여기서 잠깐!!

무엇을 어떻게 단속하는지 설명해 줄게.

각 위험물에는 법에서 정한 지정수량이 있어. 예를 들어 휘발유와 아세톤은 200리터, 경유는 1000리터, 에탄올(알코올)은 400리터야. 200리터는 드럼통 한 개 분량으로 보면 돼. 지정수량 미만으로는 안전에 유의해서 사용하면 되지만, 이를 초과할 경우 소방서에 허가를 받아야 해.

화장품 제조 공장들은 건물 밖에 별도의 창고를 지어 위험물 저장소로 허가를 받아. 이때 이 장소에 어떤 위험물을 얼마나 저장할지, 즉 지정수량의 몇 배를 저장할지를 사전에 허가받는 거야. 공장 규모에 따라 위험물의 지정수량의 수천 배를 허가받는 경우도 있어.

예를 들어, 에탄올의 지정수량은 드럼통 두 개 분량인 400리터인데, 허가를 100배로 받았다고 가정해 봐. 그러면 드럼통 수백 개가 쌓이게 되는 거지. 엄청난 양이야.

그리고 위험물을 취급할 때도 마찬가지야. 예를 들어 화장품 제조 라인에서 에탄올을 지정수량 미만으로만 사용하면 상관없지만, 그 이상을 쓰려면 그 제조 라인도 위험물 취급소로 허가를 받아야 해. 그런데 그 절차가 상당히 복잡해서, 보통은 저장소만 허가를 받고 위험물을 소분해서 제조 라인으로 가져가 작업을 해.

그래서 무허가 위험물 단속을 나가면 허가받은 장소에 허가받은 양만큼 저장하는지, 또 취급할 때도 지정수량을 넘기지 않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게 돼.


소방서 내부적으로는 적법한 단속 계획을 세우고 철저히 준비해서 단속을 실시하지만,


실제로 공장에 나가면 단속이라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


단속 공무원들은 인사이동으로 보통 1~2년 내에 바뀌지만, 그 업체들은 그 자리에 몇십 년간 버티며 영업을 이어온 사람들이야. 그러니 공장 측은 이미 소방서의 단속에 이골이 나 있었어. 단속에 대비한 매뉴얼이라도 있는 건지, 우리보다 준비가 더 철저해 보일 때도 많지.


불시에 나가든 예고하고 나가든, 공장에 도착하면 보통 그들은 마치 준비라도 한 듯이 친절하게 맞이하면서 우리가 보고 싶어 할 것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보여줘. 제일 먼저 위험물 저장소로 안내해 주는데, 그곳은 항상 허가받은 양만큼만 저장돼 있고, 심지어 구획 정리까지 깔끔하게 되어 있어. 이어서 제조 라인으로 이동할 때는 “여기서도 법적 기준을 지키고 있다”며 지정 수량 미만으로 소분한 원료들만 쓴다고 시연까지 해 보여.


그들의 설명은 친절하고 준비된 답변이라 단속 소방관이 꼬투리를 잡기가 쉽지 않아. 특히 초임 소방관이거나 단속 경험이 부족한 경우엔 그들의 설명에 압도돼 "아, 그렇군요. 네, 네." 하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 사실 나도 단속 경험이 없던 시절엔 그저 “네, 네, 아~”를 반복하며 별다른 의심 없이 돌아오곤 했거든.


공장 측은 항상 허가된 범위 안에서만 운영하는 듯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어. 단속에 나갈 때마다 이 친절한 안내와 깔끔하게 정돈된 시설들이 오히려 의심을 더 키우는 요소가 되기도 했지.




그렇게 의미 없는 단속을 몇 번 경험하고 나니,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

그중 첫 번째 의문은, 한류에 힘입어 중국에서 화장품 주문이 빗발치면서 화장품 공장이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던 시기였어. 주문서만 봐도 원료 사용량이 엄청난데, 위험물 저장소는 항상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어. 하지만 구석에 쌓여 있는 드럼통들에는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아 있어서, 마치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두 번째는, 화장품 공장과 위험물 저장소의 거리가 같은 부지 안에 있다고는 해도 꽤 떨어져 있었던 점이야. (위험물법에 따라 저장 수량에 맞춰 일정 거리를 두어야 하거든.) 그런데 매번 원료를 저장소에서 제조 라인까지 들고 나르면서 작업한다고?


이런 두 가지 의문을 품고 단속 경험을 점차 쌓아가면서 다시 단속을 나가보니, 어느 순간 상황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 겉으로 보기엔 위험물 저장소에 허가된 수량만 깔끔하게 남겨져 있었어. 그곳에는 먼지만 쌓인 드럼통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필요한 수량만 보관하는 듯 보였지.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어.


사실 위험물 저장소에 보관된 위험물들은 말 그대로 ‘보여주기용’ 일뿐이었어.


공장은 소방서 단속에 대비해 허가받은 양만 그곳에 깔끔하게 정리해 둘 뿐, 실제로 작업에 쓰는 위험물은 따로 원료로 구입해서 공장에 도착하는 즉시 작업 라인으로 바로 투입하는 식이었어. 위험물이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내부 엘리베이터를 통해 곧바로 작업 라인으로 이동시켜 작업에 사용한 거지.


이 장소는 허가받은 위험물 저장소와는 달리, 작업장 가까이에 위치해 있어서 위험물들을 언제든지 쉽게 꺼내 쓸 수 있는 곳이었어. 허가된 장소가 아닌 만큼 안전 설비나 관리 기준도 지켜지지 않았지.


왜 이렇게 위험물을 불법으로 쌓아두는지 이유를 물어보니, 공장 측에서는 “화장품 제조 과정이 대부분 자동화 시스템에 맞춰져 있어서, 위험물 같은 원료를 대량으로 투입해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어. "한 번에 충분한 양을 제조 기계에 넣어두면 자동으로 계산해서 적절한 공정에 맞춰 원료가 배분되기 때문에, 사람이 매번 저장소에서 소분해 오기에는 작업이 너무 번거롭고 비효율적”이라는 변명까지 덧붙였고.


그들은 마치 공정의 효율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변명을 했지만, 사실은 위험물 관리 규정을 어긴 채 대량의 위험물을 손쉽게 사용하려 했던 거지. 문제는 이러한 관리 부주의가 언제든 화재나 폭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다는 거였어. 공장 측은 편의를 위해 허가받지 않은 장소에 위험물을 쌓아두고 있었고, 이로 인해 그들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큰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어.


이것을 발견한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단속은 불시에 나갔지만, 공장 내부에서 영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곳곳을 살펴보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안내를 받아 현장을 확인했거든. 그러자 작업 라인 곳곳에 드럼통들이 쌓여 있는 게 보이더라고.


공장 관계자는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이 공업단지 내의 모든 화장품 공장이 다 이렇게 한다”며 불만을 터뜨리며 단속에 불만을 드러냈어. 마치 규정을 지키지 않는 일이 업계의 표준인 양, 자신들이 억울하다는 식으로 변명하더라고.


이른바 '화장품 공장 투어식 단속' 덕분에 우리는 대대적으로 위험물을 불법으로 저장하고 취급하는 업체들을 적발할 수 있었어. 안전을 미끼로 꼼수를 부리며 위험물을 사용하는 업주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정의를 구현한 셈이지.




친구야, 어때? 내 노력이 느껴졌을까? 안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서서 이뤄낸 혁혁한 단속 성과 덕분에 나도 칭찬도 많이 받고 승진에도 도움이 됐을까?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어.


대대적으로 성과를 거둔 위험물 단속 이후, 나는 내부 감찰 부서로부터 비리 조사를 두 번이나 받았어. 이유가 뭔지 알아? 익명의 제보자가 “내가 단속할 때 공장 안팎을 꼼꼼히 확인하고 다니는 모습이 마치 금품을 바라는 것 같았다”며 민원을 넣은 거야. 그들은 “돈을 줘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고까지 했더라고.


물론, 난 커피 한 잔도 얻어 마시지 않았으니 무사히 조사를 마쳤지만, 그 민원인 입장에서는 열심히 하는 내가 그렇게 비쳤을까? 아니면 단속에 대한 앙갚음을 하려고 했을까? 아무튼 감찰조사 같은 곤욕을 겪고 나니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위험물 단속에 나가도 열심히 나서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더라고.


멀리서 보면 다 희극이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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