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서에서는 소속 직원들을 대상으로 화재 예방에 관한 기고문을 작성해서 신문에 투고하도록 권장했어. 사실상 반 강제였지. 나도 그 흐름에 따라 '화재예방은 결국 사람의 손과 눈으로'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신문에 투고했는데, 뜻밖에 여러 신문에 내 글이 실리게 됐어.
그러다 어느 날, 국민방송 KTV의 피디님한테 전화가 온 거야. 도심 화재와 관련한 기획 토론회를 생방송으로 진행하는데, 그 패널 중 한 명으로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거였어. 순간 마음이 철렁했어. 나 혼자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생방송에 출연하는 데다 소방서를 대표하는 위치라니, 부담이 어마어마했지.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돌았어.
하지만 그만큼 내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 큰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책임감도 꽉 차오르더라.
생방송 토론회의 MC는 굉장히 유명한 아나운서 출신의 방송인이었고, 패널도 하나같이 쟁쟁한 사람들이었어. 전임 소방방재청장, 소방방재학 대학교수, 한국재난원 원장까지... 그 속에서 소방서를 대표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되고 어깨가 무겁더라. "이 정도 자리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싶기도 했고, 다른 패널분들의 경력과 전문성을 보니 내 작은 실수 하나가 크게 보일 것 같은 부담감도 느껴졌어. 그래도 나만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지.
방송 출연 전에는 정식으로 서장님께 승인도 받아야 했어. 소방서를 대표하는 자리니까, 당연히 모든 절차를 밟아야 했지. 서장님께 보고 드리며 승인받는 그 순간에도 책임감이 더 실감 났어. 그리고 방송 준비를 위해 피디님이 보내 준 대본도 달달 외웠지.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대본 속 문장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기며 여러 번 반복해서 연습했어. 긴장도 되고 부담도 컸지만, 그렇게 준비를 해야만 조금이라도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았거든.
낯선 서울 길을 어렵게 헤매며 방송국에 도착했어. 긴장감 때문인지 길이 더 낯설고 복잡하게 느껴지더라고. 그때까지 한 번도 안 먹어봤던 우황청심환까지 챙겨 먹고 말이야.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떨림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 방송국에 발을 디딘 순간,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하는 실감이 팍 나더라.
생방송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피디님을 포함한 스태프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어. MC와 나머지 패널분들도 차례로 도착하기 시작했지. 다들 각자의 커리어를 쌓아온 분들이라 서로 존중하며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더라고. 그런데 나는 그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 긴장감도 긴장감이지만, 이 분위기 속에서 내가 끼어들 자리가 있는 건지 조금 겁이 나기도 했지.
피디님이 현직 소방관이라고 나를 소개해 주셨을 때, 패널분들이 모두 내가 높은 계급의 소방관일 거라고 생각한 것 같더라. 소방관 계급은 소방사 - 소방교(나) - 소방장 - 소방위(주임) - 소방경(팀장) - 소방령(과장) - 소방정(서장) 이런 식으로 올라가거든. 내가 소방교라고 하니까 다들 조금 놀라는 눈치였어. 아마도 직업에 대한 무게 때문에 더 높은 지위를 상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묵묵히 현장에서 일하는 내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주길 바랐어.
그런데 내가 소방교라는 걸 알고 난 뒤부터는 방송 준비 과정에서 살짝 무시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어. 패널들끼리 전문 용어나 이론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내가 그저 현장에만 매달려온 사람이라 그랬는지, 나도 모르게 구석에서 말없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무대에서 이야기할 때조차도 내 경험이나 생각을 묻기보다는, 고위급 소방관이나 전문가들의 의견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 아쉬운 기분이 들기도 했지.
분장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이동해 자리에 앉아보니 내 자리는 화면상으로 MC를 중심으로 오른쪽 두 번째 자리였어. 화면에는 내 왼쪽 얼굴이 잡히는 위치였지.한 스태프가 내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끼워줬는데, 그 이어폰은 통제실에 있는 피디님의 설명이나 지시를 받기 위한 거였어. 처음 겪는 일이라 엄청 신기하더라고.
최종 테스트를 마치고 곧 생방송이 시작되는 순간, 가슴이 더 쿵쾅거리기 시작했어. 무려 60분이나 진행될 방송인데, 인사말 외에는 따로 대본도 주지 않았더라고. “이러다 큰 실수라도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에 순간 겁이 덜컥 나더라. 생방송 중에 내가 말을 더듬거나 엉뚱한 말을 할까 봐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했어.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순간, 이미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냥 부딪쳐보기로 했지.
친구야? 방송이 어땠을 것 같아?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 내 독주였어. 예상외로 거기 나온 세 분이 기본적인 화재 상식이나 진압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더라고. 이를테면 소화기 사용법이나 119 신고 요령 같은 건 전문가가 아니라 그냥 일반인 수준이었지. 내가 그런 부분에서 꽤나 설명을 잘해 나가니까, 피디님이 이어폰으로 지령을 내리더라고. "MC, 소방관님에게 질문하세요~", "소방관님, 지금 교수님 말씀 끝나면 이어서 말씀해주세요~" 이렇게 말이야. 점점 내가 의견을 더 많이 말하게 됐어.
그날의 토론 주제는 ‘잇단 도심화재’였잖아? 특히 주택가의 불법 주정차 차량 처리 방법에 대해 토론이 경직되었는데, 전 소방방재청장님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하시는데 다른 두 분이 외국처럼 소방차로 밀어버려야 한다고 강하게 반박하더라고. 이때도 내가 나섰어.(물론 피디님의 지시를 받아서) 실제로 우리 소방관들이 불법 주정차 문제에 대비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차분하게 설명했지.
이때부터 피디님과 MC가 나랑 청장님 VS 교수님-원장님 식으로 토론 구도를 만들어가더라고. 물론 이 싸움(?)에서도 우리가 완승이었지. 뭐가 완승이냐고? 피디님이 이어폰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주로 내게 발언 기회를 주셨거든.
솔직히 소방 방재 공학이나 재난 환경 변화 같은 두 분의 전문 분야였다면 나도 입 다물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화재 예방을 위해 평소 쉬는 날도 없이 소방 대상지를 돌며 하루에도 수십 명의 민원인을 상대했던 내 입심이 그때만큼은 최고의 무기가 되어 주었어.
그렇게 열띤 토론이 끝나고 MC가 마무리 멘트를 하시는데, '엥? 벌써 60분이 지났다고?'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집중해서 이야기하고, 그 자리 자체를 정말 즐기고 있었던 것 같아. 방송이 다 끝나고 나자 전임 소방방재청장님께서 내 자리까지 오셔서 악수를 건네고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셨지. "자랑스럽다"는 말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MC와 나머지 두 분도 다가와 칭찬을 해주시더라. 그러면서 "이런데 나오고 그러면 특진도 하고, 좋은 일 생길 거야"라며 덕담도 해주셨어.
실제로 우리 소방서에서도 생방송으로 직원들이 전부 시청하고 있었고,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서장님께도 큰 칭찬을 받았어. 물론 특진 같은 건 없었지만, 그 응원이 충분히 큰 위로였지. 나중에 들으니
부모님도 방송을 보시다가 MC가 마지막 멘트로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인사하는 걸 보시고는 두 분이 급히 일어나서 TV를 향해 맞절까지 하셨다고 하더라고. 그 얘기 듣는데, 코끝이 찡해지더라.
아, 그리고 친구야! 방송 마지막에 피디님이 내게 화재 예방에 대한 당부 멘트를 부탁하셨어.
나는 이렇게 말했지
평소에 화재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세요. 그리고 만약이라도 불이 나면 신속히 119로 신고해 주세요. 그러면 전국에 있는 우리 소방관들이 이내 여러분 곁으로 달려갈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