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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May 28. 2021

동거하는 사이

더 나은 내일의 동거인이 되고자


 혼자 보는 글이 될지언정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때가 있는데 열에 아홉 할머니와 사이가 좋을 때이다. 그런 글은 즐겁게 시작해 은근한 슬픔으로 맺음 한다. 할머니랑 깔깔  웃은 날에 쓰는 글은  그리 묵지근한지. 그런 날이 잦을수록 휴대폰 메모장의 메모와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하는 날 수도 늘어난다. 글 쓰는 습관이 배지 않은 나를 움직이는 힘이란 할머니와 사이가 좋은 날들에서 비롯된다.


 한편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날도 당연히 있다.  나이 먹고 할머니랑 다툰다는  누구도 알지 않았으면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할머니와 손녀이기 전에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개별 인격체이기에. 간단하게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거인 사이이기도  것이다.


 나는 나의 80 동거인을 화나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자알 알고 있다. 그것은 나의 동거인도 마찬가지인 듯한데 우리가 여태껏 동거인 사이를 유지해올  이유는  쉬듯 애를 쓰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애쓰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동거인이나 내가 바깥에서 예상치 않게 타격을 받고 들어온 , 또는 대낮임에도  종말   하늘이 깜깜한 날에 우리는 가끔  '애를 쓰는' 집중력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상대가 화날 확률이 100% 수렴하는 말과 행동을 저지른다.


 이와 관련하여 나의 동거인은 다양한 공격 스킬을 가지고 있는데, 그보다  다양한 것은 동거인의 공격 분야이다.  분야는 뷰티, 패션, 음식, 청결, 결혼, 성차별 등으로 특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동거인의  분야인 결혼 공격은  파워가 막강해진다.


 반면 그녀의 동거인인 나는 아직 살아내야  인생 퀘스트가 까마득한 애송이로, 스킬이란 고작해야 방금 들은  받아치기 또는 모르쇠로 일관하기가 전부다. 하지만 소문난 맛집은 음식 가짓수가 적다고. 고로, 수적으로 소탈하지만 강도 높은 에너지와 퀄리티를 집약한 스킬이라고 자부한다.  스킬은 동거인을 머리 끝까지  받게  다수의 전적을 가지고 있어 죄질이 아주 나쁘다는 특징이 있다.


 어느 점심 밥상에서 동거인은 무방비상태로 오징어채를 집어먹던 내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공격 분야는 성차별 TV  어떤 젊은 청년에 대해 내뱉은 감상이 묘하게  기분을 건드리는 돌려 치기 스킬이었다. 사실  공격의 효과는 그리 뛰어나진 않은데 기본적으로 동거인과 나는 같은 성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거인은 자신의 근본을 건드리기도 하는  말을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하는가, 그런 말을 하는 동거인 자신은 정말 괜찮은 건가 싶다. 생각이 그쯤 미칠 때 하려던 말을 꿀꺽. 오징어채와 함께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었다.


 레벨 낮은 공격을 가뿐히 막아낸  고무장갑을 벗고 돌아선 내게 동거인이 건넨 두 번째 공격은 정확히 이마 한가운데로 날아와 꽂혔다. 아유 질질질- 여기 물은  닦지도 않았네, 시집가서 그렇게 해봐라 엄마 욕먹지! 으유 여자가 되가지고 고작  문장만으로  가지 종류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다니.  가지 종류의 공격  동거인이 특히 민감하게 생각하는 하나에 반응해 동거인을 화나게 하기로 마음먹는다.  ! 시집가서 시어머니랑   건데 ! 효과는 엄청났다. 동거인은 역시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울그락불그락.. 공격이 먹혔지만 기분이 좋진 않다. 이런 일이 있으면 동거인은 저녁 먹기 전까지  말을 거의 무시한다.


 저녁 여섯 시가 가까워오면 동거인과 나는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슬그머니 일어서 거실에서 마주한다. 동거인은 냉장고를 열고 나는 밥상을 편다. 저녁은 먹어야 하므로 아까 주고받은 고성과 싸늘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무시해가며 배를 불리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초라하고 부지런한 움직임들 생이 아니면 무얼까 싶다. 동거인과 나는 눈도 안 마주치고 복화술 하듯 우물우물 말을 건넨다. 대화 내용은 이렇다.


동거인1: 국 먹어?

동거인2: . 계란후라이 부쳐?

동거인1: .


 동거인1은 뜨끈하게 데운 국을 국그릇에 적절히 나눠 담고, 계란 후라이를 다 부친 동거인2는 밥상에 앉아 현란하게 리모컨을 눌러가며 동거인1과 같이 볼 만한 채널을 고른다. 저녁밥 때가 되면 심심찮게 <나는 자연인이다> 재방송을 볼 수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동거인1의 최애이자 동거인2의 차애를 차지하는 프로그램으로 무탈한 저녁시간을 갖기에 적절하다.


 자연인 아저씨를 웃기는 윤택의 너스레를 들으면서 불규칙하게 또 같이 밥숟갈을 뜨는 저녁. 양이 좀 줄어든 반찬의 뚜껑을 닫아 냉장고 제자리에 착착 쌓아두는 저녁. 오랜 습관을 좇아 크게 힘 들이지 않고 차려낸 저녁 밥상처럼 동거인과 나도 결국엔 일상의 관성을 좇아 보통날과 같은 기분으로 각자의 잠자리에 든다. 그러다 보면 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주해 밥숟갈을 뜨는 아침, 점심, 저녁이 온다.


 동거하는 사이가 그렇다. 같이   먹고 꽁해서 뭐해, 어차피 같이  거면서. 우리는 거의 30년을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예정이다. 그래도 같이  사이니까. 서로의 예민한 성격이나 헐렁한 생활습관 같은 것들을 부득이하게 안고  거니까. 아주 가끔 서로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면  나은 내일의 동거인이 되고자 노력할 수도 있겠다. 머잖아  원래대로 되돌아갈 테지만 잠시나마 노력들을 눈치채기도 하면서. 어쨌든 국이나 반찬, TV 채널 등을 때에 따라 조금씩 바꿔가며 함께, 자주 밥숟갈을  사이인걸.


 나는 할머니에게 어제보다  나은 동거인이었을까?   동거인과 오래 무탈하게 살고 싶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견우가 '그녀' 소개팅 상대에게 그녀에 대한 10가지 수칙을 일러두듯 내일  나은 동거인이 되기 위해 10가지 수칙을 일러둔다.




더 나은 내일의 동거인이 되기 위한 10가지 수칙

[♪] I believe..


1. 동거인이 간을 다 끝낸 반찬은 그냥 맛있다고 하세요.

2. 밥 먹고 바로 소화제 드신다고 뭐라 하지 마세요. 어차피 드실 거거든요.

3. 커피포트엔 항상 물을 가득 채워 넣으세요.

4. 시장에서 파는 제철 과일 시세는 알아두시는 게 좋아요.

5. 라면 끓일 때 면이 익었다 싶으면 3분 정도 기다리세요. 동거인은 부들부들하게 불은 면을 디게 좋아해요.

6. 동거인이 옛날 얘기할 땐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해주세요.

7. 이 옷이 어떻냐고 물어보면 완전히 맞춤형 옷이라고 말해주세요.

8. 흰 옷이나 흰 신발 살 때 잔소리 들을 각오는 하셔야 돼요.

9. 가끔 어디가 아프다고 하시면 병원이나 약보단 경청이 필요한 순간이라 생각해주세요.

10. 동거인이 글 쓰는 걸 무서워하거든요. 쓴 글 읽으면서 칭찬 많이 해주세요.



완전히 맞춤형 옷을 입은 나의 동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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