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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May 14. 2021

휴먼 할머니체

노란 포스트잇과 매직펜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



 할머니와 필담을 나누던 때가 있었다. 나에게 휴대폰이 없었을 . 그래서 마실 나갔다 집에 들어온 할머니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야 했을 . A4 크기의 공책에 크게 크게 '할머니!  인혜네서 놀다 올게! 다섯  반에 올께!’ 적은  식탁에 올려놓고 나갔다. 그렇게 놀고 왔을  식탁에 공책이 없으면 할머니가  확인했다는 뜻이었다. 언제부터 공책을 메신저로 사용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할머니가 먼저 시작하셨으니 내가 보고 따라 하지 않았나 싶다. 할머니가 자주 남긴 공책 메시지는 ‘할머니 우유 사러 간다' '겨회 같다 온다'였던  같다. 나는 할머니가 남긴 메모를 읽는 것과 할머니가  메모를 공들여 적는 것이 무척 재밌었다.


 42년생 우리 할머니는 어릴 적 너무나 가난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 중에, 그중에서도 할머니들 중에 공교육을 받은 분은 정말 드물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동네 어떤 할머니가 글씨를 잘 쓰는 걸 알게 되면 이렇게 말한다. '저 할머니는 배운 할머니야, 똑똑해서 뉴스에서 뭔 말 하는지 다 안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우리 할머니도 실은 글씨를 쓸 줄 안다. 할머니의 어릴 적, 맞은편 집에 살던 정이는 여자아이임에도 때가 되자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어린 할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온 정이가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책을 들여다보는 그 모습이 마냥 부러웠다. 또, 정이가 책 읽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저도 모르게 귀가 쫑긋 열렸다. 어린 할머니는 정이네 집으로 건너가, 철수와 영이와 바둑이가 나오는 이야기에 가만 귀를 기울였다. "영이야, 이리 와. 영이야, 이리 와, 바둑이하고 놀자." 종이 위 글자들을 지나는 정이의 목소리를 따라 어린 할머니도 눈 속에 글자 하나하나를 꼭꼭 눌러 담았다. 모르긴 몰라도, 바둑이가 뛰어오는 그림을 보며 이 글자가 철수며, 영이며, 바둑이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그림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꾸 웃음이 났다.


할머니가 아직도 기억하는 정이의 학교책 (출처: 교과서박물관)



 할머니는 처음 책을 읽었던 그 날이 아주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나 보다. 70년 전에 읽었던 그 글이 아직도 똑똑히 기억난다고 내게도 아주 여러 번, 아주 명확히 읊어보이셨다. ‘내가 아직도 똑똑히 기억이 난다니까. 영이야, 이리 와. 나하고 놀자… 영이야, 이리 와, 바둑이하고 놀자…’


 철수와 바둑이 이야기 이후로 할머니가 누구를, 무엇을 통해서 또 어떤 마음으로 글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의 삶에서 이제껏 글 때문에 서러운 날들이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평생 온 식구 살림살이를 살뜰히 챙겨온 우리 할머니가 유독 글을 써야 할 때에, 그것이 반찬통이나 양념통에 붙일 이름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쓰면 틀렸지?' 하시며 매번 멋쩍어하시는 걸 보면. 동사무소에 가면 주소 같은 걸 적어달라고 할까 봐 무섭다고 하시는 걸 보면. 집에서 2, 3학년 때까지만이라도 학교에 가도록 했다면 이렇게까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 하시는 걸 보면. 어린 할머니에게 왜 그렇게 많은 일이 주어졌었는지. 왜 할머니는 그저 순응해야 했는지.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할머니의 손글씨를 할머니만 좋아하지 못하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할머니가 쓴 글자야말로 가장 타당하고 납득이 가는 소리를 담고 있다. 할머니가 쓴 글자가 너무나 정직해서, 오히려 복잡한 받침을 쓰는 표준어가 유난스러워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맑은 글자 앞에서 표준어는 좀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래도 할머니는 당신의 글씨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기관에 글자를 적어내야 할 때 나에게 대신 써달라고 하신다. 내 밋밋한 글씨가 할머니의 글씨를 대신해야 한다니, 진심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별 고민 없이 슥슥 써낸 글씨보다 할머니의 힘 들어간 글씨야말로 많은 것을 담고 있는데. 그 종이를 받아보는 동사무소나 노인복지센터 직원들은, 그런 할머니 글씨를 보고 자신이 일하는 이유를 잠시 되새겨볼지도 모르는데.


 할머니가 자주 쓰는 노란 포스트잇에 매직펜으로 쓴 휴먼 할머니체를 냉장고에서, 양념통에서, 서랍장에서, 달력에서 발견할 때마다 편안과 안도를 얻는다. 머지않은 어느 날 나도 독립이란 걸 하게 된다면 짐을 다 싸놓은 밤, 보물 찾기를 하듯 집안 구석구석 휴먼 할머니체를 찾는 데 온전히 시간을 할애하겠다. 할머니와 집 냄새가 밴 노란 포스트잇을 가방 가장 안 쪽에 보관하겠다. 그걸 왜 가져가냐고 소리칠 할머니에게 느끼한 말은 일절 하지 않고서 즐겁게 집을 나서겠다.




휴먼 할머니체 컬렉션 1탄



맛인는무근댄장


들기름


5월5일오전12시 · 4월29오전11시


매실


기에먹는약


11월달정수기가라씀


7동사무실10시일지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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