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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Apr 23. 2022

하찮은 힘듦

<취업이 안 돼서> 3편

어느 날 나의 일기장에 이 세상 모든 부정적인 단어들이 다 적혀있다는 걸 발견했다. '난 할 수 없어', '안 될 거야' 따위의 것들이었다.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와 점점 멀어지고 있는 생각의 흐름이었다. 그 순간 이건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친구에게 부탁해 상담센터를 소개받았다.


약 3개월 동안, 나는 막다른 벽 앞에 있었다. 너무 높아서 감히 통과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벽. 그 벽은 견고한 우울이 되었다가, 피해의식이 되었다가, 내게 무거운 기대를 걸던 선생의 얼굴이 되었다가, ‘너는 요즘 뭐 하고 있어?’라고 묻는 어떤 이의 얼굴이 되었다. 이미 일어난 일에 괴로워하면서 또 어쩌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면서. 그렇게 벽을 점점 더 높이 쌓았다. 얼마나 높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무슨 일로 상담을 받으러 오셨나요?”라고 묻는 순간, 그 벽은 실체를 드러냈다. 너무나 복잡하고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그 벽을 한 칸 한 칸 설명하고 싶었는데, 내 입에서는 “취업이 안 되어서요”라는 단순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최대치의 고통이 '취업이 안 되는 상태' 뿐이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슬펐다.


그녀는 내 마음에 관해 질문했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두서없이 대답했지만 그녀는 나의 한숨소리, 선택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내 감정을 무조건 수용했다. “그때 그 면접관에게 정말 화가 났어요”라고 말하면 “진짜 그랬겠어요”라고 해주었고, “그 스터디원에게 정말 질투가 났어요”라고 말하니 “저였어도 당연히 그랬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마구잡이식으로 꺼내 놓은 감정들이 모두 공감을 받으니 이상하게 갑자기 후련해졌다. 내가 감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타인에게 꺼내놓고, 그걸 인정받으니 묵직한 안정감이 몰려왔다.


상담을 받기 전엔 나의 고민을 하찮게 여겼다. 이런 고민은 대한민국 청년이면 누구나 겪는 건데 왜 나만 이렇게 유난일까 싶었다. 그런데 모든 감정을 수용받고 나니 마음을 스치는 이런 작은 생각조차도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물었다. "제가 온 이유가 너무 사소하죠? 대한민국 청년들이 모두 겪는 일인데... 선생님은 당장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도 만나시잖아요. 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그냥 지쳤을 뿐인데..."


그러자 그녀는 슬픈 눈을 하고 깊은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곳에 찾아왔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가장 힘들었기 때문에 온 거예요. 저는 당신이 겪은 고통의 10분의 1도 다 모를 거예요." 괜찮아, 수고했어, 힘들었구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위로의 언어였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안심이 되던지. 온 세상 만물이 나의 힘듦을 알아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득하게 멀리 있는 줄로만 알았던 세상이 내 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가끔 취업카페에 들어가서 괴로워하는 취준생이 얼마나 있는지를 살폈었다. ‘너무 힘들어요. 다 포기하고 싶어요.’ 이런 글에 달린 댓글을 읽었다. ‘님만 힘든 게 아닙니다. 무조건 존버 합시다.’ 차라리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게 속 편할 일이었다. 나만 특별하게 겪고 있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상담을 받으며 알게 되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다 힘들다고 해도 내가 느끼는 감정과 어려움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라는 것을. 난 그것을 간과했었다. 이 정도 힘든 건 취준생이라면 으레 겪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나랑 비슷하겠지, 하고 넘긴 건 문제였다. 점점 내 감정을 돌보는 일에서부터 멀어졌던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한동안은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 일이었다. 

나는 지금 힘들다. 남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나의 힘듦에 집중하고,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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