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 년 전, 스무 살의 민주를 처음 만난 건 약학대학 생약반 동아리방이었다. 민주는 약대 신입생으로 3월 말에 생약반에 들어왔다. 당시 3학년인 이든은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었다.
"신입생 서민주입니다. 생약반에 잘생긴 미남 미녀 선배님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후배가 되겠습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와우. 브라보"
"나이스~"
"멋지다. 신입생. 똑소리 나네."
동아리 회원들이 신입생들의 소개가 끝날 때마다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민주를 마지막으로 신입생 소개가 끝났다. 갑자기 지하 1층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후배 광현이 말로는 4학년 학생회 병도 선배가 주축이 되어 버르장머리 없는 후배들의 기강을 잡겠다고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든 선배, 본관 옥상에서 4학년이 빠따식을 하겠대요. 4학년이 3학년을 때리면 3학년이 2학년을 때리고. 우리 2학년이 신입생을 때리게 한대요."
"미친 거 아니에요?"
후배 영석이 동아리방 문을 열고 밖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병도 선배는 예비역이라 나이는 생약반 4학년 미나 선배보다 세 살이나 많았다. 별명이 미친개인 병도 선배가 동아리방에 들어왔다.
"너희들 여태 뭐 하고 있어. 모두 옥상으로 집합해."
이든은 후배들과 함께 계단을 걸어서 옥상에 올라갔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신입생 연수가 울음을 터트렸다. 옥상에 올라가자, 4학년 선배들이 군대 조교들처럼 일렬로 서있었다. 병도 선배 앞에는 나무로 만든 야구 배트 세 개가 포개진 채로 놓여 있었다. 먼저 3학년들이 맞은편에 정렬하여 서자 그 뒤로 2학년, 신입생들이 무리 지어 섰다. 이든은 빠따식을 하겠다는 선배들 앞에 나가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들, 3학년 차이든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얼차려는 저희 3학년들이 받겠습니다. 후배들이 버릇없게 굴었다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희 3학년의 잘못이 큽니다. 하지만 저희는 후배들을 때리지 않겠습니다. 2학년, 신입생 후배들은 저희가 따로 가르치겠습니다. "
"그래? 너희들만 맞으면 억울하지 않아?"
병도 선배가 히죽거리며 3학년들의 표정을 살폈다.
"나머지 3학년들도 같은 생각인가? 자, 3학년들 엎드려뻗쳐. 2학년, 신입생들 똑똑히 봐둬라."
3학년들이 엎드리기 시작하자, 뒤쪽에서 한 여학생의 목소리가 무리를 비집고 들려왔다.
"후배들이 인사성이 바르지 않다고 단체로 얼차려 주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넌 뭔데 나서고 지랄이야?"
병도 선배가 험악한 표정으로 무리를 밀치며 민주 앞으로 다가섰다. 엎드리려다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던 이든이 병도 선배 앞을 가로막았다.
"신입생입니다. 아직 약학대학 분위기를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
이든은 후배 광현에게 말했다.
"광현아, 2학년, 신입생들 모두 데리고 내려가라."
"차이든, 이제 3학년 됐다 이거냐. 아직 선배들 얘기 안 끝났는데 내려가라 마라야."
병도 선배는 괜히 별명이 미친개가 아니었다. 성질이 급하고 툭하면 앞뒤 안 가리고 위아래 없이 화를 내는 성격이라 이든의 멱살부터 잡았다.
"너 이 자식...."
3학년들이 이든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옆에 있던 학생회 미나 선배가 병도 선배의 팔을 잡아끌었다.
"병도 선배, 그 정도면 됐어요."
미나 선배가 더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4학년 선배들을 말리며 진화에 나섰다.
"너희 오늘 아주 운 좋은 줄 알아. 그리고 선배 앞에서 말대꾸한 여자 신입생. 너, 내가 지켜보겠어."
병도 선배는 민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두 손가락을 자신의 양 눈에 가져다 대며 눈을 부라렸다.
그날 4학년들이 내린 빠따식은 그렇게 3학년에서 멈췄다. 이든은 미친개가 때린 야구 배트에 맞은 엉덩이가 얼얼하다 못해 쓰라렸다. 그는 지하 1층 동아리방에 내려와 가방을 챙겼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광현이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든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학교 분위기도 어수선하니까, 신입생 환영회는 금요일에 하기로 하자. 신입생들 모두 약대 최고 동아리 생약반에 잘 들어왔다. 2학년 짝 선배들은 짝 후배들 잘 챙겨주길 바란다."
이든은 동방을 나서서 대학로 방향 체육관 입구 쪽으로 걸었다. 약대 건물을 지나 체육관까지 만개한 벚꽃 가로수 길 아래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가 흘렀다. 그들이 고개를 들어 하얀색, 분홍색, 흰 분홍색 벚꽃 잎을 바라볼 때마다 그들의 몸속 세포가 나른해지는 게 보였다. 꽃향기에 취해 정신을 잃은 몇몇은 벤치에 누워 원하는 행성으로 여행을 떠났다.
체육관에서 가까운 출입문에 이를 때쯤 민주가 이든의 몇 발짝 뒤를 따라왔다. 잠시 후 둘은 횡단보도에 나란히 서 있었다. 민주는 흰 셔츠에 프리지어 색 타이를 하고 남색 플리츠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파스텔톤 꽈배기 무늬 카디건에서 봄바람이 불어왔다.
"하숙집이 대학로라서요."
민주는 묻지도 않았는데 이든을 뒤따라온 이유를 설명했다.
"민주라고 했지. 금요일에 동아리방에서 보자."
이든이 횡단보도를 건너 대학로 입구로 들어서자, 민주도 걸음을 재촉했다.
"선배님,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저기 벤치에 앉았다 가시면 안 돼요?"
"그래, 30분 정도는 괜찮아. 아르바이트를 가야 해서."
둘은 대학로 입구에서 가까운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놀이터 주변을 빙 돌아 분홍색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비둘기 몇 마리가 놀이터 바닥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느라 구구거리며 머리를 앞으로 놀려댔다. 세, 네 살 돼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 놀이터 모래밭에서 덤프트럭 자동차와 포클레인 장난감을 갖고 모래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들은 오른쪽 벤치에 앉아 얘기하고 있었다.
“선배님, 잠시만 계세요."
민주는 가방을 벤치에 내려놓고 대학로 쪽으로 뛰어갔다. 다시 뛰어오는 그녀의 손에는 캔 커피 두 개가 들려있었다.
"옥상에서 선배님께 죄송하기도 하고 고마워서요. 제가 괜히 나서서...."
민주는 미안한 표정이었다.
"잘했어. 민주야. 그래도 미친개는 피하는 게 상책이야."
이든이 뒷주머니에서 팝콘 꽃송이가 그려진 손수건을 꺼냈다. 민주의 캔 커피 입구 주변을 돌아가며 닦아주었다. 민주는 손수건으로 펴서 캔 커피를 닦는 이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세탁해서 더럽지는 않은데...."
그제야 민주는 긴장한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게 아니라, 처음 봤어요. 이렇게 캔 커피를 닦아서 마시라고 주는 사람을."
"입으로 들어갈 건데, 캔 커피 주변이 깨끗하지 않을 거 같아서. 친구들은 놀려. 너무 유난 떤다고."
"아니, 저는 맘에 들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닦아서 주세요."
이든은 캔 커피를 마시다 앞으로 뿜었다. 그의 코에서도 커피가 흘러나왔다. 오른쪽 벤치에 앉아 이쪽을 힐끔거리던 여자들이 소리 내 웃었다. 민주는 웃음을 참느라 볼까지 빨개졌다. 벤치 위에 벚꽃이 피었다. 벚꽃이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