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떠나고 싶은 섬, 이니스프리

by 임용철

여태껏 모태 솔로는 아니었고 현재 비혼주의자도 아니지만, 이든은 줄곧 결혼만큼은 미루고 싶었다. 올해로 34살이 된 그의 고민거리는 연애도 결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에게 연애와 결혼은 사치였다. 약국을 인수하느라 대출받은 이자를 갚아나가고 엄마와 형의 생활비를 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결혼은 살만한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지인이나 친구들의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되뇌곤 했다.

그에겐 백화점에서 파는 명품 시계 이상의 가치였다. 언제 결혼할 거냐는 친구들에게 늘 이렇게 대답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울 경제적 능력도 자신감도 없지만, 배우자와 그 가족까지 챙기고 싶지 않아.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러워.”

그는 약대 동기들 결혼식에서 어렵다는 결혼을 척척 해내는 그들의 용기가 놀랍기도 하고 그럴 수 있는 처지가 부러웠다.


약사였던 아빠는 그가 약대 4학년에 진급했을 때 급성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나니, 엄마가 큰외삼촌의 연대보증을 서준 게 화근이 돼 돌아왔다. 결국, 마지막 남은 아파트마저도 은행에 넘어갔다.

엄마의 빚을 대신 갚느라 이든은 이십 대 내내 허덕였다.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손에 들고 다니는 저가 커피도 그에겐 사치였다. 페이 약사로 근무하니 점심은 자동 해결됐지만, 퇴근해서는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기 일쑤였다. 겨울철이면 난방비를 아끼느라 혼자 오피스텔에 있을 땐 보일러를 꺼두곤 했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여름휴가도 없이 악착같이 돈을 모아 서른 살이 돼서야 오억 원의 빚을 모두 갚았다.


빚을 모두 갚았는데도 가슴이 답답하고 귀에서 윙윙거리는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젊어서 하는 생고생은 사서 해도 되는 게 아니라, 병든 육체만 남길뿐이었다. 부모의 뒷배는 생각보다 그 위력이 대단했다. 잃어본 사람만이 그 소중함을 알 수 있었다. 이든은 자신이 땡전 한 푼 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될 줄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드라마에서나 듣던 대사를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게 된 벼락거지가 될 줄 몰랐다.


민주는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차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가 되면, 그에게 그녀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왔다. 그때마다 이든은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 형편이 나아지면 인사드리자며 그녀의 부모님과의 만남을 미뤄왔다.

의대교수였던 민주의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반대할 만도 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와 형을 자네가 돌보며 산다고."

"네. 아버님."

민주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엄마와 형의 존재에 대해 당분간 부모님께 말하지 않는 게 어떠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숨긴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차라리 떳떳하게 말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나을 거라며 그녀를 설득했다. 지금 호미로 막을 걸 나중엔 가래로도 막을 수 없다고 말이다.

"이왕 이렇게 왔으니, 식사나 하고 가게. 나는 밖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이만."

그렇게 민주 아버님은 선약이 있다며 밖으로 나가셨다. 민주가 따라나서며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시라고 만류했지만, 그녀는 결국 풀이 죽은 채 혼자 되돌아왔다. 그녀의 어머니도 천천히 음식을 들라며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목소리를 낮추고 어머니와 대화를 이어갔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마음은 이곳이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녀의 부모님께 큰 기대를 한 자리는 아니었다. 이든은 6인용 상아색 꽃무늬가 섞인 대리석 식탁에 홀로 앉아 있었다. 식어서 윤기를 잃어가는 잡채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아빠가 생전에 잡채를 즐겨 드셨는데.'

그도 아빠만큼이나 잡채라면 사죽을 못쓸 정도로 좋아하는데도, 한 젓가락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아빠 생각이 나서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진 않았다. 소고기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가져가려던 이든은 식욕이 없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선배를 만나보시면 분명 마음이 바뀌실 거야."라고 민주는 망설이는 그를 설득했다. 지금은 형편이 좋지 않으니,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지면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게 어떠냐고 말해보았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막상 그 결과를 확인하고 보니, 이든은 더 이상 민주의 부모님 집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이 공간 속에 불편한 이방인으로 존재하기 싫었다. 혼자라도 좋으니 얼른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서 놓여있고 싶었다.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숨 쉬는 게 나아질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와 낯선 골목길을 무작적 혼자서 걸었다. 민주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문자가 도착했지만, 휴대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작정 이곳에서 아주 멀리, 그녀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을 뿐이었다.

신입생 때 예이츠의 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그는 그의 책상 벽면에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이 붙어 있었다.

램프의 요정 지니가 소원을 물어봐준다면 첫 번째 소원은 "나를 이니스프리 호수 섬에 데려다줘"라고 빌고 싶었다.

'그곳이라면 잠시나마 꿈을 꿀 수 있겠지.'

두 번째 소원은 "거북이처럼 한 3개월쯤은 동면하고 싶어. 나를 깨우지 말아 줘."


'이제 일어나 떠나리,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거기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리라, 진흙과 가지로 만든 집을.

아홉 이랑의 콩밭을 가꾸고, 꿀벌의 둥지를 두리라,

벌 소리 가득한 숲 속에서 홀로 살아가리라.'


지니가 세 번째 소원을 물으면 "음, 깨우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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