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워런 버핏이 살고 있다면, 그는 듣기로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렸다, 이곳 만복동 복개천 골목길 끝자락엔 독립 서점 오마하가 있었다. 이든은 '오마하'라는 네이밍의 의미를 사장님에게 직접 전해 듣기 전까지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이민 2세대로 오마하에서 태어나셨나?'라든가,
'뮤지컬 <위키드>에선 에메랄드 시를 다스리는 위대한 마법사의 고향이 오마하였던거 같은데.'
서점은 꽃으로 뒤덮인 세이렌들이 사는 안테모사 섬처럼, 이든이 점심을 먹으러 나서는 길 중간쯤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엔 서점 유리창에 아이들이 크레용으로 그린 동그라미와 꽃, 사람, 헵타포드 외계인들과 교신이 가능할 법한 낙서들이 눈에 띄었다. 다른 날엔 하얀색 커튼 너머로 젊은 엄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오월의 햇살 아래를 꿈꾸듯 걷던 그에게 독립 서점 오마하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에 이전에도 서점은 있었지만, 그에게 들어오라 손짓한 적은 없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벽에 지른 선반에 다양한 제목의 동화책들이 키를 재듯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독립 출판한 아이들의 책들이 오밀조밀하게 포개져 전시돼 있었다. 창가에는 아기자기한 골판지로 만든 자동차 장난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혹시, 이곳에서 성인들을 위한 독서 모임 같은 게 열리나요?”
“아니요, 아직 성인 독서 모임은 따로 없습니다.”
서점 지기인 수연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사장님, 궁금해서 그러는데.... 오마하가 무슨 의미예요?"
"오(Oh), 마(My) 하(Hearts)"
그녀는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일곱 살짜리 아들이 지어줬다고 대답했다. 이든은 메모지에 그의 연락처를 남기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들이 천재네요."
자동차로 십여 분 거리의 아파트 상가로 오마하 서점이 이전하면서 이든은 독서 모임이 있는 월요일엔 십분 일찍 퇴근을 서둘렀다. 이전한 서점에서 인테리어를 했기 때문에 지난 팔월엔 모임이 없었다. 한 달 쉬었을 뿐인데 모임에 대한 호감이 줄어든 건 그만 아는 비밀이었다. 불과 두 달 전만 하더라도 이든은 열에 들뜬 표정으로 독서 모임 회원들에게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그리고 생텍쥐페리의『야간비행』을 차례로 소개했었다. 『야간비행』을 이야기했던 날은 그 흥분의 정도가 임계점을 뛰어넘었다. 그는 작가 생텍쥐페리의 B(Birth)와 D(Death) 사이의 흥미로운 얘기들로 회원들의 호기심을 끌어올렸다. 그녀들의 표정이 절정의 순간에 이르자 분위기에 한껏 취해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 진공상태와도 같은 구름 위에서,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파비앵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회원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이든의 다음 한 마디를 기다렸다.
“아내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을 거예요.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다면....”
때마침 서점 옆을 바삐 지나가던 한 여학생은, 발코니 창 너머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오마하에 오늘 신입회원이 나올 거라고 책방지기 수연 씨가 단톡방에 공지글을 띄웠다.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도 첫 독서 모임이 낯설고 불편할 거예요. 모두 잘 대해 주실 거죠.”
'책방지기다운 마음 씀씀이네.'
그는 그녀의 글에 하트 이모티콘을 달았다. 그리고 신입회원이 이곳 오마하에 뿌리내리고 힘껏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생각해 보면, 우린 서로에게 모두가 낯선 타인이다. 속내를 덕장에 말리는 명태처럼 전부 내보일 수 있다면 좋겠다.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북풍한설을 맞으면 더 이상 곪아 터진 상처를 숨기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이든은 만복동 약국을 인수하고 충무로에서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약사들의 스터디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가 만복동에서 충무로 화로구이 포석정까지 도착하고 보니, 시간은 저녁 8시 30분을 훌쩍 넘겼다. 9시에 모임이 끝나니, 이제야 들어갈 수도 없었다. 내처 집으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얼굴만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 가게 앞을 서성거렸다. 결국 지하철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흰색 재킷 가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청록색 수첩 첫 장에는 아빠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이든아, 우리 아들이 아빠와 같은 길을 걷게 돼서 정말 기쁘단다. 황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게 시간이란다. 부디 시간을 붙잡아라.'
수첩은 이든이 약학대학에 합격했을 때 아빠가 백화점에서 골라준 입학 선물이었다. 이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수첩에 적어 내려갔다.
'좋은 모임이란 뭘까. 회원들이 모임을 손꼽아 기대하고 기다리는, 지식이나 지위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그리고 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주고 격려해 주는, 날 선 말로 상처 주지 않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듯한 당신의 눈빛에 마음속으로 기도해 주는, 그러다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곳이 아닐까.'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차 약사는 흰색 재킷 가운을 벗고 남색 맨투맨으로 갈아입었다. 약국 출입문을 닫고 돌아서니 아스팔트 위에 달궈진 공기가 늦은 오후의 나른함을 더했다. 3층 옥상에 주차해 놓은 흰색 그랜저 차량은 강한 여름 햇볕에 달궈져 있었다. 이든은 운전석 문을 열고 조수석으로 가서 십여 차례 문을 여닫았다. 그리고 차의 시동을 켜고 2열 창문을 10cm가량 아래로 내렸다. 차 안에 열기로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출발할 자신이 없었다.
“시원하게 비가 좀 내렸으면 좋겠다.”
이든은 차량의 수온계가 기준선 위로 올라가자, 에어컨을 최대로 작동시켰다. 차 안의 온도는 33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