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째 가뭄이 깊어져 가던 무더운 열대야의 날들이었다. 7월 26일 금요일 아침이 되자 이든은 여름용 차렵이불을 돌돌 만 채로 침대에서 지그시 눈을 떴다. 밤새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에 방안에는 서늘한 냉기가 술 냄새와 함께 숨죽여 고여 있었다. 침대 발치에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자, 그는 이불속에서 발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두발을 차례로 꼼지락거렸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을 때 보이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그는 이불을 안은 채 좌우로 뒹굴뒹굴하다 중심을 잃고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이, 아파라”
이든은 바닥에 부딪혀 혹이 생긴 머리를 재빨리 문질렀다. 민주의 집을 나서 택시를 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오피스텔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젯밤 후배 민주의 입술을 탐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에 앉아 와인에 취한 그녀의 입술이 살짝 열렸을 때,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든은 그녀에게 다가가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은 꽃샘추위에 떠는 새순처럼 파르르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돌아온 건, 그의 입속을 제집처럼 헤집고 다니는 그녀의 날렵한 혀였다. 그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해 질 녘 교회의 종소리나 키스할 때 연인들의 마음속에서 들린다는 사랑의 종소리는 없었다.
고요한 기쁨이 밀물처럼 마음 깊숙한 곳으로 흘러들었다. 서로의 몸을 탐하는 입술과 혀의 춤사위는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체취를 떠올릴수록 의식은 몽롱해졌다. 그는 잠옷 아래 단단해진 자신의 성기를 만지며 오랜만에 우쭐한 만족감에 빠져 들었다. 이든은 지킬박사와 같이 섬세했다가 거침없이 행동하는 하이드 씨로 변신했던 지난밤의 기억을 청록색 가죽 표지 수첩에 적어두었다.
아침 8시 반까지 출근하는 이든은 복개천 공영주차장에 서둘러 흰색 그랜저를 주차했다. 출근 시간이 촉박했지만, 그는 약국이 아닌 근처 골목길에 있는 콩나물국밥집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날씨에 조금 걸었는데도 푸른색 반팔 남방 소매에 땀이 배어들었다. 그는 그늘이 있는 상가들 차광막 아래를 따라 걸으며, 지금 본인은 칼바람에 발을 동동거리며 시베리아 벌판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 본다. 아무 소용이 없다. 매년 반복되는 이놈의 무더위와 추위에는 도무지 익숙해지는 법이 없다.
'지난겨울 첫눈이 언제 내렸지?'
그날은 아침인데도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 회색빛이 돌았다. 간간이 비까지 내려 을씨년스러웠는데. 집사와 산책을 나선 출근길에 만난 흰색 포메라니안은 갈색 털조끼를 점잖게 차려입은 채로 수북이 쌓여있는 은행잎들을 뒷발로 신나게 흩어놓았고 바닥에 쓰레기처럼 수북이 쌓인 염치없는 낙엽들을 빗질하느라 아파트 경비원들이 아침부터 부산했다. 이든은 큰돈을 보내달라는 엄마의 독촉 전화를 받고 나서, 손님들에게 복약지도를 하면서도 종일 초조하고 불안했다. 가파르게 뛰는 심장박동에 호흡이 불편했고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흉통에 이대로 혼자 아파트 안에서 돌연사라도 하면 어쩌나 우울해했던 날이었다.
‘약국을 넘기고 딱 한 달만 제주살이를 해볼까? 그럼, 목구멍까지 가득 차올라 있는 이 답답함이 좀 가실까.’
퇴근 후 아파트 식탁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몸집을 키운 빗소리는 베란다 창문을 후드득 때렸다. 세차게 내리는 겨울비에 단지 내 노란 은행잎과 선홍빛으로 물든 단풍잎들은 외마디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갔다. 그는 깊은 밤 첫눈이 내릴까, 저녁밥을 먹다가 설거지하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다가도 베란다 창문 앞을 궁싯거렸다. 잠들 때까지 기대했던 눈은 내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베란다로 다가가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을 때, 시야는 온통 은빛 설국이었다. 잿빛 하늘 아래 나뭇가지들은 무거운 습설을 품고 사람들이 바라봐주기를 새벽부터 손꼽아 기다린듯했다.
전주 국밥집에 들어가니 가게 안은 이른 아침 해장하는 손님들로 붐볐다. 이 집이 복개천 맛집으로 유명한 건 맛있는 콩나물국밥과 더불어 오징어젓갈과 어리굴젓 덕분이었다.
“사장님, 김치 콩나물국밥 주세요.”
“안녕하세요. 차 약사님.”
국밥집 사장님은 약국 단골손님이셨다. 수험생 자녀들 영양제를 사러 오기도 하고, 탈모가 있어 석 달 치 탈모약과 탈모치료제 로게인폼을 사 가기도 하셨다. 약국에 방문하면 좋은 여자가 있다며 만나볼 의향이 있는지, 요즘 만나는 여자는 있는지 궁금해하셨다. 그때마다 사모님은 남편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줬다.
“이이가, 약사님 불편하게.”
그러나 차 약사는 그런 오지랖이 싫지 않았다.
이든은 단골손님이 으레 하듯 익숙하게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왔다. 잠시 후, 홀을 누비며 음식을 서빙하는 로봇이 국밥과 밥그릇에 담긴 수란 그리고 두 가지 젓갈을 가져왔다. 콩나물국밥에 토핑으로 올라가는 오징어양이 평소보다 두 배는 많아 보였다. 감사 인사를 하려고 주방 쪽을 바라보니 어느새 테이블 옆에 와계셨다.
“잘 먹을게요. 사장님.”
“네, 더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수육 한 접시를 테이블에 슬며시 내려놓고 가시며 손가락 하트를 보내셨다. 마이클 조던의 ‘노룩패스’가 울고 갈 지경이다. 이든도 왼손에 든 수저를 내려놓고 손가락 하트를 보냈다.
어젯밤 민주와 바에서 마셨던 칵테일이 과했는지 이든은 일하는 내내 숙취에 시달렸다. 진통제를 먹으면 두통은 좀 가시겠지만, 워낙 약 먹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생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약사였던 아버지는 매일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동네 박 내과에 가서 혈액검사라도 받아보라고 가족들이 성화를 내어도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셨다.
“30년 차 약사가 내 병 하나 다스리지 못할까.”
그래서 이든은 웬만한 통증에는 약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약사님, 숙취로 힘들면 오후에는 최 약사님께 좀 봐달라고 하세요.” 접수대에서 일하는 혜원 씨가 점심시간을 앞두고 밀려든 장기 처방 환자들을 응대하고 짬이 났는지 말을 건넸다.
“티 많이 나요?
“네, 무슨 식은땀을 그렇게 흘리세요.”
이든은 손수건을 꺼내 가운데 가르마 주변 이마를 닦았다.
“나라에 큰일이 생기려나 봐요."
“네?”
이든은 싱크대 앞으로 걸어와 거울에 비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농담이에요. 혜원 씨, 우리 감잎차 좀 남은 게 있어요?”
그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조금 남아있을 거예요. 제가 감잎차 준비해 드릴게요.”
이든은 조제실 소파에 앉아 김이 오르는 감잎차를 후후 불어서 조금씩 목구멍으로 넘겼다.
“아, 좋다.”
그는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앞으로 기지개를 켰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는 인지심리학자의 말이 맞았다. 이런 사소한 기억의 편린들에 사람은 기쁨을 느낀다.
그는 감잎차를 마시며 짧은 순간 행복하다고 느꼈다. 머릿속이 개운해지고 속이 편해지는 이런 기분. 오랜만이다.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요.”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자고 가라고, 민주는 그의 팔짱을 끼고 어린애처럼 졸랐다. 그녀의 젖가슴이 팔꿈치에 부드러운 감촉으로 느껴졌다.
“너, 불편해서 안 돼.”
"선배가 불편한 건 아니고."
이든은 민주의 팔짱을 풀고 오른쪽 구두를 마저 신으려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주겠다는 건지.”
민주의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간다. 너는 나오지....”
그는 취기가 올라와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눈앞에 차가 있었고 민주가 친절하게 문까지 열어주었다. 몸은 중력을 거슬러 공중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떠오르던 몸을 뒤에서 껴안아 붙들어 맸다.
그는 택시 뒷좌석에 널브러진 채로 사진앱을 열어 민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뒤돌아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와 단둘이 자전거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 무렵에 찍은 사진이었다. 여름날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그녀로 인해 싱그러웠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필름이 끊겼버렸다.
"사내 녀석이 그렇게 술이 약해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 한 잔을 마신 후 토했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가 그에게 타박하며 했던 말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말술이셨다. 앉은자리에서 정종 한 병을 비우셔도 끄떡없으셨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버지와 겸상하고 술을 마셔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술을 대적해 주는 형을 더 미더워하셨다. 형은 아버지와 죽이 잘 맞았다. 적어도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만큼은.
‘말술이었던 아버지의 유전자는 내 몸 어디쯤에서 길을 잃어버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