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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Jun 26. 2024

창밖은 가을

창밖은 가을, 장편 소설

6월이 시작되자마자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기후 위기라더니 장마도 빨라졌다. 며칠 쉼 없이 내리던 비가 멈추고 해가 쨍하게 뜨자 연재는 모든 문을 열고 눅눅해진 집 안을 말렸다. 장롱 속 겨울옷을 꺼내 바람이 드는 창가에 걸다가 멈칫했다. 보라색 겨울 코트를 거는데, 창가 테이블에 세워둔 해종의 작품 속 여인이 입은 옷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품을 들고 코트 뒷모습을 보니 영락없다.      


연재는 이 코트를 언제 꺼내 입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나 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그 안에서 ‘퍼플레인’ 영수증이 나왔다. 그제야 생각났다. 크리스마스이브, 연재가 외로움을 피해 퍼플레인에 갔고, 그곳에서 해종을 만난 사실이. 밤늦게 집으로 걸어오는 길, 엉엉 울었고 계단을 올라가다가 해종의 뒷모습을 본 듯했는데, 그가 진짜 해종이었구나. 여인과 달, 그림은 해종이 그때 연재 모습을 보고 만든 것임을 이제야 알았다. 자기 뒷모습도 몰라보다니, 정말 바보 같다.


연재는 코트와 작품을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었다. 

“작품의 비밀을 이제야 알았네요” 사진과 함께 문자까지 해종에게 전송했다.

“영민하십니다!”

“근데 그날 밤 저를 따라오신 거예요?”

“밤늦은 시간이라 혹시라도 위험할까 봐 그랬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불쾌라뇨, 고맙습니다. 늘 받기만 했네요”

“그럼, 갚을 기회 드릴까요?”

“네! 주세요!”

“주말에 저랑 영화 보실래요?”
 “네, 제가 영화도 보여드리고 밥도 살게요!”

해종은 춤추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연재는 픽하니 웃음이 났다.     


                         *     

두 아들이 오는 날, 연재는 도착 두 시간 전부터 기차역에 나가 서성였다. 돌아보면 미안한 것투성이다. 생각해 보면 그 사건을 겪고 새들이 떠나지 않으면 보낼 방도가 없는 나무처럼, 연재도 무기력하게 아이들이 먼저 떠나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자기 상처가 너무 커 품어주지 못했고, 어떤 순간엔 두 아들의 존재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더 정확히는 아이들 얼굴 보기가 부끄러웠다. 당시 연재는 속인 남편에 대한 원망보다는 등신같이 속고 산 자신을 더 혐오했으니까.     


이런 부족한 엄마도 엄마라고 만나러 와주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은 이미 한도 초과 상태다. 세 명의 가족이 같은 상처를 안고 그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2년을 떠돌았다. 이제 그 끝에서 어떤 얼굴로 마주하게 될지 떨리는 마음이다. 그동안 연재의 상처는 햇빛에 바라고 바람에 말라붙었다. 그 딱지 위에, 비 내리고 눈 내려 다시 피 흘리길 여러 차례, 이제야 그 위로 돋은 새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해짐을 느낀다.      


기차가 도착하고, 아이들이 내렸다. 씩씩하게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두 아들의 품에 연재가 안겼다. 품 안의 자식이 어느새 자라 부모를 품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격정의 만남을 뒤로하고 아이들은 각자의 생활을 찾아갔다. 민준이는 복학해 기숙사로 들어가고, 민재는 컴퓨터 게임 스토리 개발자가 되고 싶다며 관련한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다행인 건 다들 연재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싶어 운명을 원망했는데, 아무리 나쁜 일도 지나고 나면 다 나쁜 것만 있지 않다는 말이 왜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렇다고 그런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 매미도 지쳐 나가떨어질 8월 말, 기다렸던 손님이 왔다. 혜진이다. 혜진은 유모차를 정원에 세우고 아장아장 걷는 시우 손을 잡고 카페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연재가 놀란 눈으로 서 있자 현이 먼저 반갑게 혜진을 맞았다.     


“누나, 잘 지내셨어요?”     


혜진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연재의 눈은 시우를 향했다. 반년만이 이렇게 크다니, 연재는 시우를 번쩍 안았다. 시우의 이마에도 땀이 뽀송하게 올라왔다. 연재는 시우의 이마를 닦으며 에어컨이 가장 시원한 자리로 혜진과 시우를 안내했다. 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시원한 보리차를 가져왔다. 연재가 시우의 오종종한 입에 컵을 대고 보리차를 먹였다. 시원해서 좋은지 자꾸 마시더니 한 컵을 거의 다 마시고야 카페를 돌아다녔다. 카페 안은 한적해 시우가 돌아다녀도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아마도 혜진이 한가한 시간을 맞춰 온 것 같았다. 어떻게 지냈냐는 연재의 말에 혜진은 그와 헤어지고 싱글맘으로 시우를 키우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그 사건 이후 그의 가정으로 돌아갔고, 그나마 다행인 건 양육비는 매달 보낸다고 했다. 연재도 다행이라며 혜진의 손을 잡았다. 그러다 문득 이율배반적인 자신을 발견했다. 지현이 재산 분할 소송을 해왔을 때 분노에 치를 떨었는데, 혜진의 일에 다행을 느끼다니. 하지만 분명, 그 감정도, 이 감정도 진실했다.  

   

가방만 만지작거리는 혜진도, 시우만 바라보던 연재도 다음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연재가 먼저 퀼트 팀원이 여섯으로 늘었다는 얘길 꺼냈다. 아이 데리고 취미활동 할 수 있다는 소식이 맘카페에 퍼지자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 엄마 셋이 더 합류했다는 소식. 혜진이 소풍에 첫 번째로 만든 활동인데, 계속 성장하고 있어 혜진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건지 혜진은 만지작거리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며     


“이거 일 년 후에도 가능할까요?”     


연재가 혜진의 아파트 전봇대에 붙인 퀼트 강사 구한다는 전단이었다. 당장은 시우가 너무 어리니까 그때처럼 취미반을 이끌고, 일 년 후 시우가 어린이집 갈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시작해 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시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지 않다면서. 연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시우를 번쩍 안아 볼을 비볐다. 또 혀 짧은 소리가 나왔다. “우리 시우 잘 이쩌쩌요?” 시우는 여전히 아기 냄새가 났다.     

당장 그 주부터 혜진은 퀼트팀에 합류했다. 자신의 우울한 감정이 시우에게 전염될까 봐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예전보다 혜진은 밝아 보였다. 밝게 살려고 애쓰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런 혜진을 보며 연재는 생각했다. 어떤 날은 그렇게 살아질 거고, 또 어떤 날은 무너지기도 하면서 단단해질 거라고. 연재가 그런 것처럼.   

  

벌써 소풍 1주년이 다가왔다. 다시 가을이다. 현이 기획했던 프로젝트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프로젝트 모임의 이름은 ‘괜너괜’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를 긍정하는 이름 ‘괜찮아 너라서 더 괜찮아’가 어딜 가나 여러모로 딱 들어맞는다. 무엇보다도 명석한 현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없단다.     


1주년 이벤트는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기획한 탱고 공연이다. 그때 현악 사중주 공연 피날레 무대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며,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봤기에 본격적으로 춤 공연을 열고 싶었고, 여러 가지 여건이 잘 맞아 이번 탱고 공연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 공연에 연재는 오랜 베프 수영을 초대할 예정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잠수 타버린 어이없고 못난 친구지만, 수영은 분명 올 것이다. 한쪽 눈을 흘기면서 기꺼이. 한쪽에 데크로 무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해종이 맡았다. 공사는 소풍이 문을 닫은 시간에 시작되었다. 해종이 그러자고 했다. 여름 땡볕에 일하긴 힘들기도 하고 낮 동안은 방문객들이 편하게 이용해야 한다면서.      


해종과 현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바닥 평탄화 작업을 먼저 하고 현이 데크 놓을 자리에 데크를 쭉 늘어놓으면, 해종이 수평을 맞추고 나사못으로 고정했다. 얼음물을 들고 나온 연재가 한참 동안 이들을 바라봤다. 해종은 역시나 능숙했고 현은 무척 안정되어 보였다. 현이 그럴 수 있도록 그를 돕는 해종이 있고, 수찬이 있고, 제하가 있다. 제하 혼자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현의 어둠, 그것을 모두 한 자락씩 나눠 잡으니 이 평온이 온 것 같았다. 땀을 비 오듯 흘리던 현이 얼음물을 보자 “아하!” 하며 다가와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갑자기 잊고 있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 2월 호숫가 조깅 나갔을 때 현이 짓던 표정 말이다. 연재는     


“그때 말야, 2월 초쯤 새벽에 조깅하고 있을 때 우리 만났잖아. 그때 그 표정 뭐야?”

현이 빈 컵을 내려놓고 씨익 웃더니

“사장님, 기억 안 나요? 작년 가을인가? 아니, 늦여름인가? 

그때 사장님 조깅하다가 제 뒤에 숨었잖아요. 저 그때 웬 여자가 제 뒤로 숨길래 봤더니 앞에 어떤 남자가 등산용 지팡이 들고 뒤로 파워 워킹하면서 걸어오는 거예요.

저도 깜짝 놀랐는데 이분도 놀라셨구나 싶어 제가 몸으로 가려드렸는데”

연재는 번쩍 그때가 떠올랐다. 기억하고말고. 

세상에…. 넓고도 좁은 게 세상이라지만 그게 현이었다니.      


                         *     

일요일 오전, 

느긋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커피를 내린 연재는 창가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을 열었다. 

잠시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연재는 새 문서를 폈다.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커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천천히 넘겼다. 코끝에 맴돌던 커피 향이 식도를 거쳐 위로 내려가는 느낌이 느껴졌다. 마치 먼 길 떠나기 전, 차에 주유하는 것처럼 커피로 주유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던 소풍에서 만난 사람들과 벌어진 일에 관한 기록을 시작하려 한다. 제일 먼저 소제목을 맨 위에 적었다.      

‘낯선 도시의 이방인’      


쓰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쓰고 지우기를 여러 차례, A4 한 장을 겨우 쓰고 저장하기를 눌렀다. 쓰기 시작했다는 설렘인지, 한 장을 썼다는 안도인지 모를 긴 숨이 가늘게 떨리며 저절로 흘러나왔다. 연재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가을 햇살을 받이 일렁이는 호수, 그 위를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 그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호숫가를 걷는 사람들의 밝은 웃음소리 위로 선홍색 저고리를 갈아입은 나무들, 그 위를 점프하듯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의 소란한 날갯짓과 시름없는 푸른 하늘, 검붉은 적색과 갈색으로 잠옷을 갈아입고 바닥에 누워버린 성질 급한 낙엽들이 저마다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창밖을 응시하던 연재는 새 폴더에 제목을 적었다.      


‘창밖은 가을’     


                                    



지금까지 창밖은 가을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다음 주 에필로그를 끝으로 긴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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