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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Nov 17. 2020

생과 사의 숫자 사이

-한명회 머리 위의 빛과 불꽃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생이 시작한 4자리의 연도만 갖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 사람은 생의 시작과 끝의 숫자가 마무리되었다. 역사 논문을 쓸 때 출생과 사망 연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이름 옆에 생몰년을 표시한다. 그 숫자와 숫자 사이, 예를 들면 936~994, 1385~1457 등으로 표시되는 숫자 사이의 작은 문자(~)에는 한 사람의 삶이 담겨 있다. 그 삶의 길이는 대개 100년 이내이다. 


4자리 숫자로 시작한 우리들의 삶은 특정한 마감 숫자를 향하는 진행형이다. 모두에게 지독하게 공평하다. 내가 어떻게 하고 있던 시침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더 열심히, 성실히, 쉬지 말고 등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한 가치이다.  그 이전에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를 놓치지 말았으면 한다.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보기 드문 영화를 누린 한명회(1415~1487)가 있다. 그는 칠삭둥이로 태어나 간신히 살아났지만,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글을 배웠지만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뜻을 이루어 문종-단종-세조-예조-성종의 장장 다섯 왕대를 거치며 고관 요직을 역임하였고, 공신에도 4번 책봉되었다. 두 딸은 각각 예종과 성종의 왕비로 들이는 데 성공하였고, 73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다. 말년에는 잘 알려졌듯이 갈매기와 친하다는 뜻의 자신의 호와 같은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다.


한명회가 사망한 날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부고 기사에는 그가 미관말직을 간신히 얻고 영통사에 놀러 갔을 때의 일화가 있다. 한 늙은 승려가 주변 사람을 모두 물리치고 한명회에게 은밀히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대의 머리 위에 빛과 불꽃이 있으니, 이는 귀한 징조다’(1487년(성종 18) 11월 14일)


수십 년 전 늙은 승려와 한명회 단 둘이 나눈 대화가 어떻게 그가 사망했을 때 실록에 실리도록 알려졌을까? 


영통사를 방문했을 때의 한명회는 마흔이 가깝도록 과거 합격도 못한 채, 개성의 경덕궁 궁지기라는 보잘것없는 직임을 겨우 맡았을 때였다.  객관적 조건으로 보면 위축되고 열등감에 빠지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미 한명회가 차후에 크게 영달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명회가 자기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가 알고 믿은 것은 자신이었다. 스스로를 빛과 불꽃을 지닌 ‘존귀한 사람’이라고 믿고, 드러내었다. 이 때문이 사관이 그 사건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년도 채 안 되는 수명을 부여받았다.  사는 동안 누렸던 직책, 보유했던 재산, 아끼던 모든 소유물은 그가 사라지면 그 가치도 퇴색한다. 남은 것은 그의 삶이 남긴 의미이다. 한명회의 벼슬자리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불우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알고 믿으며 꿈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것은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흐르는 시간 자체는 의미가 없다. 시간이 예나 지금이나 같은 속도로 가고 있다는 것 말고 무슨 뜻이 있겠는가. 역사와 시간의 의미는 자신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든 사람이 창조해 낸다.




부록 :



우리 생과 사의 숫자 사이는

3자리를 넘지 못하죠.

대개 2자리로 마감되는 

짧은 기간입니다.


당연했던 일상이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린 나날들

손안에 따뜻한 커피는 여전한데

옆자리는 차가운 공간


지금의 모든 당연함도

언젠가의 그리움이 될 수 있으니

우리 서로 함께하는 이 시간에

따뜻한 마음의 옆자리를 

서로에게 내어주는 사람이기를

소망합니다. 


글/그림 Seon Choi

겨울비 치적치적 내리는 밴쿠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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