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nChoi Nov 25. 2020

다문화

- 문화와 구습의 경계

한민족(韓民族)이 형성된 시기는 7세기 어간부터로 설명한다. 혈연적 단일민족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생물체로서의 한민족이다. 이러한 의미의 한민족은 오랜 기간 주변의 다른 민족과의 커다란 뒤섞임이 없이 그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하지만 주변 지역에서 오는 사람은 꾸준히 발생하였다. 역사에는 내내 북쪽의 여진인, 남쪽의 왜인, 또는 서역에서 왔다는 사람들, 표류하여 온 사람들 등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오늘날은 '귀화'라고 하지만, 역사적 기록은 이들을 주로 향화인, 투화인 등으로 지칭하였다. 중국을 제외한 지역에서 온 향화인은 기본적으로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단순히 표류로 도착한 표류민은 외교적인 관계 속에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돌아갈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 표류한 사람들 가운데 장기간 조선에 머물거나 결국 향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잘 알려진 네덜란드에서 온 박연(벨테브레)이나 하멜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박연은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자식을 두고 살았지만, 하멜은 13년 뒤 일본으로 탈주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은 향화인이 ‘우리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원한다면 정벌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국가의 기본적인 정책은 조선으로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기본적인 물품이나 혜택을 제공하고, 결혼을 주선하였다. 상당기간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과 다른 그들 본래의 풍속을 금지, 교정하고 유교적으로 교화시키는 정책도 전개하였다. 여진이나 왜의 풍속인 변발을 금지하여 상투를 틀게 하고, 취수혼(형사취수)처럼 조선과 다른 풍속은 금지하고, 조선옷을 입게 하는 등 귀화인을 문화적으로 조선에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조선인과 향화인을 가르는 기준은 문화적 다름이었으며, 이 점에서 보면 향화인은 조선인으로 흡수되는 문이 열려있던 셈이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의 커다란 전쟁을 겪은 뒤로 이민족에 대한 인식과 향화인에 대한 정책은 크게 달라졌다. 두 난을 겪은 뒤 조선은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침략군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 우월감이 겹쳐 이민족에 대한 반감이 크게 일었다. 향화인에 대한 정책도 크게 변하였다. 이제 향화인은 국가적·혈연적으로 구분되는 이질적이고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문화적인 차이와 달리 혈연적 구분을 용해시킬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자칫 장황할 수 있지만 최대한 간략하게 향화/귀화의 역사적 흐름을 짚어 봄은 오늘날 다문화 사회에 대한 개인적 소회가 있어서이다. 한국은 이제 다문화사회로 전환하였고, 공중파에 다문화 가정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여러 가지로 늘어났다. 


다문화가정은 2020년에 1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다’는 공적인 슬로건 아래 다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하자, 부정적 편견을 버리자 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화 자체에도 분별력을 갖고 청산해야 할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듯이, 다른 나라 문화에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캐나다의 밴쿠버는 다문화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2012년 캐나다에서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한 남성이 세 딸과 첫째 부인을 명예살인으로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한꺼번에 네 명의 여성에 대한 살해를 도운 둘째 부인과 아들도 유죄 평결을 받았다.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관습을 고수하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캐나다에서만도 2002년 이후 드러난 명예살인만도 13건이다.


물론 위 사례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문화를 여전히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온갖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에 살지만, 절대로 수용하고 싶지 않은 문화도 많다.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 여전한 신분제도, 계층과 지역에 따른 강한 차별 등.


그러므로 다문화와 공존함에 분별력을 잘 가졌으면 한다.  이 땅에 온 사람들을 더불어 살 수 있도록 잘 품어줌이 정말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문화에는 한국사회가 피 흘리고, 상처 받으면서 때로는 목숨까지도 내놓으며 처절하게 극복해 온 문화가 여전히 있음도 잘 가려야 한다.  간신이 극복해 내온 구습을 행여 다시 인정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그림 Seon Choi

※ 다문화사회 통계와 내용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의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작가의 이전글 생과 사의 숫자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