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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Jan 19. 2022

나 자신을 알기란… 쉽고도 어려운 일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읽으며 파편처럼 떠오르는 기억의 기록

에크하르트 툴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우리는 끊임없이 에고와 싸운다. 소유로 물질로 에고는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는 나를 찾기 위해 호흡하고, 명상한다.


책을 읽는 동안, 파노라마처럼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세상은 그런 우리들에게 종교로, 영화로, 대화로 알게 모르게 그 치열한 에고와의 싸움에 많은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었다.

파편 같은 조각들이 날아가버리기 전에 하나하나 모아 본다.


1)

2018년, <Call me by your name>을 보았다. 아직 낯설고,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던 주인공들의 관계에 잔뜩 긴장하고 영화관에 들어섰다. 그날 나는 정말 오랜만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있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사랑'이라는 하나만으로 둘을 바라보았 때,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눈물 흘리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간이 겪는 사랑의 상실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내가 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자꾸 맴도는 서로의 이름, 자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부르던 모습...그냥 그게 마음에 남았다. 그 날의 눈물은 벅차고, 슬퍼서 뜨거웠다.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당신의 ‘순수한 있음’을 알아볼 때 그 알아봄이 이 세상 속으로.
두 사람을 통해 더 많은 ‘순수한 있음’의 차원을 가져다준다.

에크하르트 툴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중에서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 중에서


2)

20살 초반, 나름 방황의 시간에 직면했을 때, 친구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매주 한 번씩 교리를 받았는데, 친구의 엄마가 대모님이라 도중에 그만 두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출석했다. 이런 마음으로 세례를 받아도 될까? 싶던 찰나,

‘힘들고 지친 자들이여, 나에게 오라’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고, 갈 곳을 잃은 나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라는 말이 메아리쳤다.


교리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고,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가득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저 나에게 오라는 그 말이, 절대적이지 않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이끌림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세례를 받았다.

그렇다. 당신이 진리다. 만약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고 있더면 매번 속을 것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예수는 이것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로 전하려 했다. 예수의 이 말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직접적으로 진리를 가리킨다. 하지만 잘못 해석하면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예수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존재. 모든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크하르트 툴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중에서
이미지출처 : 핀터레스트

(3)

‘이 또한 지나가리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할 때, 무서울 때, 고통스러울 때 입버릇처럼 하는 이 말을 한다. 이 고통의 시간을 뛰어넘고 싶은 일종의 주문 같은 것이다. 자칫 허무할 수 있는 이 말을 대뇌이면서 정말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저 고통도 과정이고 그 속에서 배우는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함께 의식적으로 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이 말을 통해 마음에 위안을 만들었다.


미친 듯이 즐겁고 행복한 순간 안에 서 있을 때는, 간절히 기도를 한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주문을 외우는 찰나, 이 순간들이, 더 나아가 삶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절을 읽으며 내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반지에 새겨진 글귀는 삶의 좋은 것들을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시기에 약간의 위안을 주려는 것도 아니다. 더 깊은 목적이 있다. 모든 상황의 덧없음을 자각하도록 하게 위함이다. 이 덧없음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형상이 가진 무상함에 기인한다.

에크하르트 툴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중에서


이미지출처 : 핀터레스트

한 없이 어렵고,

한 없이 쉬운 책.

우리는 그렇게 에고를 넘어 ‘나’를 알아보는 방법을 많이 듣고, 보고 살고 있음에도

그걸 알아차리는 게 쉽지 않나 보다.

나 자신을 알기란…

참… 어렵고도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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