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지나, 아일랜드의 시를 걷다.

타이타닉 마지막 항구, 코브 그리고 웅변의 블라니 성

by 헬로 보이저

코브 항구, 타이타닉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언덕 위 작은 교회, 코브의 고요한 풍경

코브 항구. 타이타닉 기념 벽화

블라니 성 이정표 코크 항구 세관 건물 코브 언덕 위 교회



회색빛 안개가 깔린 아침,
배는 조용히 아일랜드 코크에 닿았다.
갑판 위엔 아직도 밤의 물기가 남아 있었고
바람은 겨울의 예고처럼 차가웠다.

항구에 내리자 가장 먼저 보인 건
‘타이타닉 1912–2012’라는 문구.
거대한 벽 위에 적힌 그 글자는
과거에서 걸어온 한 줄의 기억처럼
눈앞에 멈춰 서 있었다.

이곳은 코브(Cobh),
타이타닉호가 영국을 떠나
마지막으로 정박했던 항구.

1912년 4월 11일,
수백 명의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미국행 희망을 품고 이곳에서 배에 올랐다.
그중 많은 이들이 다시는 육지를 밟지 못했다.

나는 항구 끝에 멈춰 서 있었다.
바다 위에 흐르는 물결은 고요했고,
그 평온함이 오히려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을 더 짙게 만들었다.

마치 영화 속의 잭과 로즈처럼,
누군가는 사랑을 품고 있었고
누군가는 살아남겠다는 기도만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여정이 영원히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차를 타고 더블린으로 갈 계획은
배에서 내리는 시간이 늦어져 바뀌었고,
대신 블라니 성으로 향했다.

버스로 50분.
초록의 들판과 돌담이 이어지는 길,
마치 잔잔한 시 한 구절처럼
아일랜드의 풍경은 천천히 펼쳐졌다.

성에 다다르자,
전통 복장을 한 남성이 플루트를 불고 있었다.
그 소리는 애틋하고 따뜻해서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블라니 성.
15세기에 세워진 이 고성은
중세의 흔적을 품은 채,
말보다 마음을 믿는 이들의 전설이 남아 있었다.

꼭대기로 이어지는 좁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블라니 스톤’이 있다.
그 돌에 키스하면 웅변의 재능이 생긴다는 말.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몸을 젖히고
그 돌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나는,
말보다 더 깊은 감정으로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성벽 위 바람은 차가웠고,
회색 하늘은 낮게 드리워졌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 바람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날의 아일랜드는
타이타닉이 남긴 상실의 물결,
블라니 성이 전해주는 전설,
그리고 내가 느낀 조용한 떨림으로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알았다.
슬픔이 머문 땅일수록,
그곳에서 피어나는 위로는 더 깊다는 것을.



블라니 성 입구 동굴길 블라니 성 정원 전망

코크 시내 중심가 동상 거리 리 강 위에 비친 회색 하늘

블라니 성 외벽과 나무들 코크 외곽 공원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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