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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주용 JulieSim Aug 23. 2016

낯선 여행객이 낯선 여행객에게 털어놓은 비밀 in바르셀

세계일주 가려고 퇴사한 28살 여자 이야기: 스페인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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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도, 가장 많은 교감을 나눴던 연인과도, 가장 친한 친구와도 나누지 못했던 것들을 어쩌다 만난 낯선 이와 나누게 되는 것. 

처음 가 보는 장소에 대한 적당한 긴장과 설렘, 이국적인 공기, 생소한 냄새,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이나 혀에 감기는 풍성한 맛 같은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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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로처럼 얽혀 있는 바르셀로나 구시가지 골목 어딘가에 있는 이름 모를 상점 앞에 앉아 있었다. 플라멩코 공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양 손에 쥐고 있는 추로스를 얼른 먹고 다시 미로 같은 골목을 헤쳐 공연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바빴다.


“내가 왜 친구한테도 못한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 놓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추로스에 핫 초콜릿을 찍어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있는 내게 그가 문득 말했다. 베어 문 추로스를 차마 씹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날 보며, 그는 그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는 몇 달 전,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느끼게 만드는 큰 아픔을 겪게 되었다고 했다. 그 아픔을 치유해 보고자 큰 맘먹고 떠나 온 여행이지만, 역시나 여행이란 게 드라마틱하게 뭔가를 바꿔주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현실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여전히 많이 괴롭고 혼란스럽다고 했다.


나는 그런 큰 아픔을 만난 지 이틀 된 낯선 여행객에게 털어놓는 그가 좀 당황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런 쉽지 않은 얘길 내게 꺼내 준 그가 고맙기도 했다.

때로는 가까운 친구보다도, 생소한 사람에게 속 깊은 비밀을 털어놓기 더 쉬운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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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겪었던 아픔 그대로를 겪어보지 않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내가 겪었던 가장 큰 아픔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인생은 일 년을 놓고 봐도, 하루를 놓고 봐도, 항상 플러스와 마이너스 곡선을 반복해서 그리잖아요. 하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모든 플러스와 마이너스 곡선들이 합쳐져서 결국 누구나 공평하게 0으로 수렴하는 그래프를 그리게 될 거라 생각해요. 

지금은 가파른 마이너스 그래프 어딘가를 지나고 있는 시기일 거예요. 그 마이너스 곡선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꽤나 긴 시간이 지나야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반드시 다시 플러스 곡선을 그리게 될 거예요. 전 그렇게 믿어요. "

그가 겪고 있는 아픔의 깊이를 아마 반도 채 이해하지 못할, 아직 어린 내가 하는 그 말이, 어쩌면 조금은 건방져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힘든 일을 겪은 뒤 홀로 떠나 온 여행에서 아마도 더 지독하게 고독했을 그가 어렵게 털어놓은 이야기에, 멀뚱멀뚱 추로스나 씹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플러스 곡선을 그리게 될 때까지 힘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겠죠. 저도 힘들 때 힘내라고 하는 말에 항상 힘이 더 빠졌던 것 같아요. 시간이 해결해 줄 때까지 그저 충분히 아파해요. 다른 것에 몰두하고 싶으면 몰두하고, 그러다가 생각나 울고 싶으면 울어요.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많은 노력 끝에 쌓은 자존감까지 잃지는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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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그의 사연으로 인해 이제는 꽤나 아문 내 과거의 아픔까지 새삼 떠올라서인지, 바르셀로나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추로스 가게에서 산 추로스와 핫 초콜릿에서는 씁쓸한 맛이 났다.


‘딩, 딩, 딩...’

대성당 종소리가 시간이 훌쩍 흘렀음을 일깨워 주었고, 우리는 미처 다 먹지 못한 추로스를 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황망히 찾아간 플라멩코 바에서는 가수가 감기에 걸려 공연이 취소되었다며 우리를 허무하게 돌려보냈다. 


그래도 괜찮았다. 마이너스가 한 번 지나갔으니, 곧 플러스가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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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행 에세이에 자신이 찍어준 사진이 한 장이라도 올라가면 기쁠 것 같다면서, 늘 몇 걸음 뒤에서 열정적으로 내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결심한 걸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나의 ‘당참’에서 어떠한 영감을 받는다고도 말해 주었다.

“제 포토 에세이가 단 한 명에게라도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전 계속 글을 쓸 거예요.”

나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더 당차 보일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내일 바르셀로나를 떠나, 세비야를 들렀다가, 포르투에 간다고 했다. 나는 내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준 포르투 도우루 강이 그의 아픔도 조금은 치유해 주길 바라며, 그의 남은 여행을 응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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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지 골목을 벗어나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스물다섯 살의 내가 썼던 일기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과연 나 자신은 3년 전 내가 썼던 일기대로, 오늘 내가 그에게 했던 말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과연 글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부끄럽지 않은 여행을 하고 있는지...




*2013년 6월 4일의 일기

뻔한 문장도 어느 날 문득 한 자, 한 자 곱씹어보면 새삼 감동받을 때가 있다. 오늘 내가 곱씹은 문장은 ‘Let it be.’ 

이곳저곳에 끄적인 과거 기억의 파편들을 주섬주섬 모아보다 보니, 나는 어느 시점 뭔가를 막연히 바랐었고, 얼마 뒤 놀랍도록 그 일이 현실로 이뤄지기도 했다. 내가 나를 철저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내가 알던 나를 거짓말처럼 바꿔놓는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했다. 내가 굳게 믿었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했으며, 나를 괴롭히던 큰 고민이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저 웃음이 나오는 일에 불과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름으로 불리지도 않았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생소한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되고, 특별했던 사람이 다시 생소한 사람이 되기도 했으며, 그래서 아직까지 계속 내게 특별하게 있어준 사람들이 눈물 나게 고맙기도 했다.

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인생은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반복하면서 역동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점이 새삼 놀라웠다. 역동적이면서 자연스럽다는 것. 

인생을 가까이에서 보면 다이내믹하기 그지없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멀리서 되돌아보면, 극단적으로 느껴졌던 그 역동적인 플러스와 마이너스들이 내 인생 곡선에서 매우 조화롭게 연결된 작은 점들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마이너스를 찍고 있다고 느껴지는 오늘, 너무 우울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나중에 지금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곧 있을 플러스 곡선을 준비하는 마이너스 곡선 맨 끝, 조화로운 인생 곡선의 일부를 맡고 있는 고작 점 하나일 뿐일 테니까. 플러스가 가면 마이너스가 오고, 마이너스가 가면 플러스가 오는 이 완벽히 균형 잡힌 아름다운 세상의 이치에 좀 더 익숙해져 가는 과정이니까. 

그렇기에, 오늘도 센티함을 애써 정당화할 필요 없이, 그저 Let it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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