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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주용 JulieSim Aug 11. 2016

고독을 민낯으로 마주하는 법 in 마드리드

세계일주 가려고 퇴사한 28살 여자 이야기: 스페인 마드리드

혼자 떠난 세계여행이지만, 여러 가지 우연과 인연으로 정말로 혼자 다녀야 했던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계획 없이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에 덩그러니 떨어지고 나니, 여기서는 현지 친구도, 뜻밖의 동행도 없이 철저히 혼자라는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게다가 스페인은 의사소통의 기본인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내 스페인어는 아직도 우노 도스 뜨레스 세르베사 부에노스 디아스 수준인데, 대부분의 스페인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해 온 몸으로 '리얼 바디랭귀지'를 구사해야만 겨우 약간의 의사 전달이 가능했다.


그에 더해, 여행이 두 달째 접어들다 보니 말로만 듣던 '여행 권태기'란 것도 찾아왔다. 지도를 읽는 것도, 길을 잃는 것도, 낯섦 속에서 방황하는 것도 신물이 났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처음에는 살짝 경계하다가, 서서히 친해져 정이 들고, 정들자마자 이내 아쉽게 작별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새 친구를 사귀려면 호스텔에 가야 했지만, 10인 도미토리룸에서 나중에는 몇 명 기억하지도 못할 수많은 국적과 이름들을 외우려 애쓰며 통성명을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시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다소 허름해도 혼자 쓸 수 있는 방을 구했다. 마침 집주인 네 가족은 내가 도착한 다음날, 처음 보는 내게 쿨하게 집을 맡기고 휴가를 떠났다. 17유로에 집 전체를 빌리게 된 셈이었다.


#

갑자기 밀려오는 우울과 고독이 늘 내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캐리어 파는 곳을 물색해 쨍한 코발트블루색 캐리어까지 장만했다. 하지만 빈 캐리어를 덜덜덜 끌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외로웠다.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하여 집에 가는 길에 있는 음식점들을 기웃기웃거렸다. 혼자서도 아무 데나 들어가서 잘 먹는 나지만, 왠지 그 많은 타파스 집, 케밥 집, 카레 집 중 어느 곳에도 선뜻 들어갈 수 없었다. 삼삼오오 웃고 떠들며 다양한 요리를 시켜 나눠 먹는 사람들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며 밥을 삼킬 자신이 없었다. 낯선 이들에게 나의 고독을 들킬까 두려웠다. 다음 음식점에서도, 그다음 음식점에서도, 나는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그렇게 다 지나치다 보니 어느덧 집이었다. 결국 슈퍼에서 바나나 4개와 물 1.5L짜리를 사서 텅 빈 숙소로 돌아왔다. 스페인 햇살을 듬뿍 받아 촉촉하고 달달할 줄 알았던 바나나는 그렇게 퍽퍽하고 싱거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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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때문인지, 꾸역꾸역 먹은 바나나에 체한 건지,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40도를 웃도는 날씨에 창문도, 선풍기도 없는 반 지하방에 누워 이틀 내리 진땀을 흘리며 앓았다. 끙끙 앓면서 누워 있어도 이 큰 스페인 땅 그 누구 한 명 개의치 않을 것이란 생각에 한층 더 슬퍼졌다. 그나마 내게 바나나를 팔았던 슈퍼 아주머니가 불쌍하다며 눈은 한 번 깜빡여 주려나?


한국에서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외롭다고,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세계시각을 체크해 보니 한국은 새벽 5시였다. 내 고독 때문에 그들의 단잠을 깨우고 싶진 않았다. 한국 시간으로 아침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침이 되니, 또 그들의 바쁜 출근 준비를 방해하고 싶진 않아졌다. 오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이내 한창 일하느라 정신없을 그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졌다.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또 문득 ‘하루 종일 일하느라 힘들었으니 신나게 놀고 있거나 조용히 쉬고 있을 텐데...’ 싶어 졌다. 

이윽고 한국 시간으로 밤이 되었다. ‘이제는 괜찮겠지’ 하며 카톡을 켰다.

"엄마, 나 아파"하고 치려다가, 명랑한 목소리로 잘 지낸다고 말해도 걱정이 태산인 엄마가 막내딸 아프다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속을 끓일지 안 봐도 훤해 그냥 지워버렸다.

"누구야 누구야, 나 외로워"하고 치려다가, 문득 그들이 “외로우면 돌아오면 되잖아.”라고 말할까 봐 두려워졌다. “돌아갈 순 없어.”라고 말하기엔 그 이유가 부족해서, 그만 “그럴까?” 해 버릴까 봐 또 지워버리고 말았다.


한국은 다시 새벽이 되고, 나는 결국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못해 더 외롭고, 그래서 더 아파 (혹은 아픈 것 같아) 진다.

#

말 그대로 소통할 사람이 없을 때 더 외로울까, 소통에 지쳐 스스로 고독을 택할 때 더 외로울까? 

두 가지 모두 포함되는 나는 어떤 게 더 외로운 건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핸드폰을 치우고 누워 있으니, 어딘가에서 들은 구절들이 떠올랐다.


요즘에는 외로워지면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외로워해, 리즈. 외로움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워. 외로움의 지도를 만들어. 평생 처음으로 외로움과 나란히 앉아봐. 
-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중-


성숙한 태도란, 인생은 불안하고 외롭다는 것을 숙지하고 사는 것이다. 
-강신주 박사- 


외로움은 공평하다. 지금 당신은 외로운가? 당신만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누구나 외롭다. 지금 당신 차례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누구나 외롭다. 
-가수 박진영 책 <미안해> 중-


지독한 고독도 피할 수 없는 여행자의 숙명이기에,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이기에, 있는 힘껏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웃집에서 나는 고소한 빵 냄새, 지글지글 생선 굽는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왁자지껄 웃으며 떠드는 소리...

그중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괴리감 속으로 침잠했다. 가면을 벗었다. 민낯으로 외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겸허히 그를 받아들였다. 더욱더 깊이 받아들였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고독 속에서 평온해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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