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우리 아빠의 이야기.
남편이 직장을 관뒀다. 꽤 오랜 기간 고민을 하던 남편은 생각을 정리해 가더니 올해 초 결심을 한 듯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졸업 후 14년간을 일해 온, 남편 인생의 그 어느 조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낸 그 회사에 마지막으로 출근을 했다. 남편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하며 나 또한 하루 종일 마음이 간지러웠다.
한 회사에서 14년이라... 두 번째 직장에 5년째 다니고 있는 나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그리고 가장으로서 남편이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기에, 안쓰러운 마음과 설레는 마음 등등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그리고 우리 아빠의 퇴직이 떠올랐다.
우리 아빠는 30년을 한 직장에 다니셨다. 졸업과 동시에 입사 그리고 퇴직을 할 때까지 한 직장에서, 거의 비슷한 일을, 평생 해온 것이다. 어렸을 때는 아빠가 회사를 다니는 건 너무나 당연해서, 그 30년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상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내가 일을 하고, 연차가 쌓이고, 계속되는 직장/커리어 고민을 하면서 아빠의 30년 직장 생활이 어떤 것이었을지 조금씩 깨달아 갔다. 맘에 안 드는 상사/동료가 있어도, 조직에서 불합리한 일을 당하더라도, 몸과 마음이 지쳐도 아빠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야 팀을 옮기거나 이직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때려치우는 것 또한 옵션인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지만, 한창 자라나는 세 아이들을 보며 아빠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는 은행을 다니셨다. 그래서 아빠의 지갑에는 항상 새 돈이 있었다. 설날이 되면 친척들이 모여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는데, 작은 아빠들은 헌 돈으로 세뱃돈을 주셨지만, 우리 아빤 항상 빳빳한 신권을 개인별로 봉투에 담아 사촌들과 우리들에게 주셨다. 나는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아빠의 직장에 대한 무게를 처음으로 느낀 건 IMF 때였다. 신문에 연일 기업들 부도 소식과 은행들의 위기가 흘러나오던 어느 날, 아빠는 머리를 빡빡 밀고 들어오셨다. 은행 노조의 반대 시위 이런 거였던 거 같은데, 아빠 모습에 아이들이 놀랄 까 봐 엄마가 우리를 앉혀놓고 설명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빠의 삭발 투쟁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다니던 은행은 결국 다른 은행에게 매각되었고 아빠가 입사한 회사는 사라졌다.
얼마 전에 본 '국가 부도의 날' 영화에서 IMF 과정을 상세히 볼 수 있었지만, 내 기억 속의 IMF는 엄마의 걱정스러운 얼굴과, 그런 엄마를 담담하게 안심시키던 아빠의 목소리다.
은행 산업 변화의 한 복판에 서있던 아빠는 50이 넘어선 어느 날 퇴직을 하셨다. 아빠가 퇴직할 때까지, 엄마는 30년 동안 매일 아빠의 와이셔츠를 다리셨다. 아빠는 매일 아침 그 눈부시게 새하얗고 풀 먹인 듯 빳빳한 와이셔츠를 입고 집을 나섰다. 결혼 준비 하면서, 어렸을 적 사진을 찾다가 서랍에서 엄마의 노트를 발견한 적이 있다. 우리 집에 대한 엄마의 이런저런 기록이 담긴 노트였는데,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었다. 아빠의 마지막 출근 전날 엄마의 일기였다.
'내일은 남편의 마지막 출근 날이다. 남편이 내일 입고 갈 와이셔츠를 다리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아무도 없는 오후, 기다란 베란다 창문 옆 거실 바닥에 앉아 널찍한 다리미 판을 펼쳐놓고 아빠의 마지막 출근 와이셔츠를 다리면서, 우리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편의 퇴직은 우리 아빠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가볍다. 그랬기에 남편도 나도 걱정과 두려움보다는 설렘과 새로운 다짐으로 퇴사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겠지. 지금은 시대적인 트렌드도 그렇다. 이직은 안 해본 사람이 이상한 거고, 퇴사 후 창업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옵션이고, 다른 수입원을 만들어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건 모두의 꿈이다.
'직장'에 대한 요즘 세상의 유연함 그리고 약간의 가벼움을 나는 두 손 벌려 환영한다. 남자들에게는 '가장이지만 괜찮아'라는 위안을, 여자들에게는 '엄마이지만 괜찮아'라는 도전을 할 수 있게 해 주니까.
엄빠한테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
힘들었지 아빠.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