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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은 Jul 05. 2021

[필사 노트-자전거 여행] 바위처럼 단단히 지켜준 나의



수만 년을 물의 흐름에 씻긴 바위들은 그 몸속에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모든 연약한 부분들을 모조리 물에 깎인 그 바위들은 완강한 단단함으로 물속에 박혀 있었는데, 그 단단함은 유연하고 온화한 외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바위는 박혀있는 바위인 동시에 흐르는 바위였고, 존재 안에 생성을 간직한 바위였으며, 가장 유연한 형식으로 가장 강력한 내용을 담아내는 바위였다.

자전거 여행 1 -김훈






지난 일주일간 아이들 둘 다 장염으로 아팠다. 3-4일간 고열과 설사, 구토가 지속되었다. 처음 큰애가 39도 이상 고열이 날 때는 코로나 검사를 해야 하나 내과를 가야 하나 망설여졌다. 아침 9시가 되기 전이라 문이 열린 병원도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일단 갔다. 대형병원 응급실은 늘 그러듯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일단 고열이 발생하니 코로나 의심증상으로 인해 폐 사진 X-RAY를 찍었다. 다행히 아무 이상은 없었다. 난 곧바로 코로나 검사를 하는 줄 알았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코로나 검사는 희망하면 별도 신청해서 하는 거라고 했다. 일단 응급실에서 진행하는 피검사, 소변검사만 진행했다. 고열 발생 원인을 찾기 위한 검사들이었다. 불편한 의자에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면서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수액을 맞으면서 아이는 버텼다. 처음 병원에 도착했을 때보다 열을 좀 내려서 다행이었다.


2-3시간을 기다린 후에 수액 투여도 완료되고 담당 의사를 만나서 검사 결과 소견을 들었다. 다행히 바이러스 의심 증상을 없다고 했다. 별다른 이상반응이 없다고 해서 퇴원을 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코로나 검사를 의뢰했다. 큰애가 고열이 발생해서 둘째까지 학교를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 상태였다. 학교에 코로나 결과 여부를 통보해 줘야 했다. 오후 1시경 코로나 검사를 위한 채취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둘째 아이까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힘이 없고 두통이 있다고 했다. 둘 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계속했다. 그래도 그날은 식사도 정상적으로 해서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집에서는 계속 핸드폰 문자 확인만 했다. 코로나 검사 결과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직원들이 퇴근 후에도 결과를 알려줄지 궁금했다. 드디어 저녁 11시가 되어 결과 문자가 왔다. 다행히 음성 판정이 나왔다. 가족들은 모두 안심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큰아이는 고열이 나긴 했지만 곧 나 을리라 여겼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확인해보니 둘 다 몸이 불덩이였다. 남편과 나는 비상사태였다. 아이들 둘 다 제대로 걷기도 힘들고 눈도 뜨질 못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다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갈 수는 없었다. 뻔히 어떤 절차를 진행할지 예상되었다. 그래서 동네 내과에서 진찰을 받기로 했다. 아침 9시 전에 전화로 증상을 문의해보니 장염이 의심된다고 했다. 큰 아이는 걸을 수 있어서 먼저 내과를 방문했다. 진료 결과를 장염으로 나왔다. 바로 병실에서 수액을 맞았다. 그 사이에 남편은 작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 작은 아이는 걸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업고서 병원까지 왔다. 진료실에 앉을 상황이 안되어 회복실 침실에 뉘었다. 의사는 직접 회복실에 아서 진료를 했다. 역시 둘째도 장염이라고 했다. 두 아이 모두 회복실에서 수액을 투여하며 장시간 기다렸다. 둘째는 증세가 훨씬 심해서 수액을 두 개 난 맞았다. 아침 9시에 병원에 갔다가 오후 4시가 넘어서 일이 끝나서 집에 돌아왔다.




아이들은 누룽지 2 숟갈 정도만 먹었다. 남편은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집에 있는 밥과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왔다. 차 안에서 후다닥 점심을 해결했다. 우리까지 기운이 빠지면 큰일이었다. 대충이라도 먹으니 기운이 났다. 이런 때일수록 부모가 잘 버티고 있어야 했다.




두 아이 모두 집에 데려와서 눕혔다. 수액을 맞고 약도 먹어서 금방 나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 2일간 고열이 계속되었다. 금요일 오후가 되니 열이 떨어지고 다시 오르진 않았다. 하지만 식사를 잘하지 못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물 설사가 계속되었다. 주말이 되니 드디어 아이들 상태가 좋아졌다. 먹고 싶은 음식도 말했다. 일주일이 지나간 이 시점에 아이들은 거의 회복을 했다. 아직 소화를 잘 못해서 화장실은 하루에 5번 이상을 들락거린다. 다행히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집에서 지켜보면서 돌봐주면 될 거다.




두 아이를 돌보는데 남편과 내가 서로 힘을 모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 혼자서는 두 명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이 아픈 기간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아이들이 아파도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부모가 없는 상황일 때 아팠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그리고 부모 중 한 명만 있어다 면 과연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아이들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잘 버텨준 아이들에게도 감사했다. 아이들 태어난 이후로 가장 심하게 아픈 기간이었다.




그리고 난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고등학교 때인지 대학 때인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도 장염을 앓았다. 엄마는 평소에 워낙 건강하셨다. 어느 날 갑자기 기력이 없으셨고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다. 장염이라고 했다. 그래서 장염이 큰 병이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나는 그때 당시에 엄마에게 죽 한 그릇도 해드리지 못했다. 철들만한 나이였는데 난 엄마에게 아무건 간호도 해드리지 못했다. 엄마는 아픈 와중에도 집안일을 다 해내셨다.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방 걸리질도 다하셨다. 엄마는 그런 걸 줄 알았다. 늘 그 자리에서 변치 않게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엄마는 아파도 티 안 나고 변함없이 내 주위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아픈 와중에도 집안을 돌보셨다. 내가 알아서 엄마 밥상이라도 차려드렸어야 했는데 난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었다. 날 조금은 원망하지 않으셨을까? 




10대 후반인 나도 그때 철이 없이 나만 생각했다. 그러면서 난 지금 아이들이 철없이 행동하면 야속해한다. 늘 내 옆에서 바위처럼 엄마가 지켜주신 거였다. 가난한 살림에 아빠도 없는 가정을 이끌어가시는 동안 수없이 상처 나고 고통을 당하셨을 거다. 단 한 번도 힘들다고 투덜대고 티 내지 않으신 엄마다. 바위처럼 단단한 엄마였다. 유연하게 우리를 지켜주신 거였다. 자식들은 모나지 않게 살기를 바라시면 당신이 늘 중심에 서계셨다. 내 옆에서 꽉 박혀서 흔들리지 않고 나 바라보고 지켜주신 엄마다.




엄마는 늘 단단하고 완강하게 있었지만 난 몰랐다. 그저 따뜻한 나의 엄마로만 기억할 뿐이었다. 아이들이 아프니 친정엄마 생각으로 맘이 더 아프다. 자식으로서 간호한 번 제대로 못 해 드린 철부지 딸이었다.





늘 바위처럼 든든히 내 옆에서 날 지켜주고 버텨준 엄마, 보고 싶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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