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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은 Sep 08. 2021

그래도 아빠는 앞에 내세우면 든든했어

남편과 아빠 사이

엄마!!!!!



친정엄마란 단어는 그냥 엄마와는 왜 이리 다를까? '친정엄마'는 왠지 내가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네. 가끔은 친정엄마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말을 꺼낼 때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울컥 뭔가 올라와서 말문이 막힐 때가 있어. 엄마 인생을 생각하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간절해서 이기도 하겠지.


엄마! 

엄마를 부르면 아빠라는 단어가 따라오잖아. 난 아빠가 그다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어. 아빠 하면 떠오르는 감정이 뜨뜻미지근하달까. 내 가슴을 따뜻하게 메꿔줄 기억이 왜 이리 없을까? 아빠가 나에게 잘 못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빠가 갑자기 회사에서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고모들이 갑자기 우리 집에 와서 날 깨우고 집안이 시끌시끌했어. 그러더니 내가 입고 잤던 티셔츠를 벗겼어. 가슴에 빨간 새가 하트무늬가 크게 박혀있던 흰색 바탕 옷이었어.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어. 흰색인지 검은색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 옷으로 갈아입었어.


"아빠 돌아가셨어"


갑자기 그렇게 아빠가 돌아가시다니. 말이 돼? 아빠가 심장이 안 좋았다고 알게 되었어. 모든 가족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났지. 그 시절에는 장례식장에 반드시 가는 시절이 아니었지. 집에서 장례를 치렀어. 손님들이 오고 가고 정신없던 며칠을 보냈어.








엄마! 예전에 내가 엄마한테 이렇게 물어본 거 기억나?


딸 : "엄마는 아빠가 있을 때가 좋아? 없을 때가 좋아?"

엄마 : "네 아빠가 그래도 똑똑해서 늘 든든했어. 어딜 가도 앞에 내세우면 무슨 문제든 거뜬히 해결했으니깐. 그리고 아빠가 별짓을 다했어도 생활비는 꼬박꼬박 갖다 줬어."


헐!!! 세상에 엄마의 대답을 듣고 난 기가 막혔다.





엄마 어릴 적 난 학교가 끝나고 집에 들어갈 때면 늘 겁이 났어. 아빠는 일의 특성상 2-3일마다 하루씩 쉬었던 같아. 아빠가 집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늘 불안했어. 술을 드시고 오시면 집안 살림을 부수고 엄마를 때리고. 왜 아빠가 화가 났는지 알 수도 없었고 식구들 중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했어. 그저 아빠의 미친 짓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지. 그리고 아무도 다치질 않길 바랄 뿐이었어. 엄마한테 무슨 큰일이라도 생길까 봐 늘 조마조마했어. 나에게 아빠란 존재는 뭐였을까? 난 아직도 모르겠어. 아빠한테 난 혼나 본 적도 없고 예쁨만 받은 것 같은데 지금은 상처만 있어. 


어젯밤에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더듬어봤어. 엄마 말마따나 아빠는 어디 내놓아도 든든했지. 말 잘하지 유머스럽지 리더십 있지. 집에 계실 때면 큰언니가 아빠를 위해 마련해준 조선왕조실록을 늘 붙잡고 계셨어. TV를 보거나 틈 날 때면 조선의 가십거리들을 재미나게 해 주셨어. 그리고 우리 집에 있던 턴 데이블이 기억나네. 전통음악을 자주 들으신 것 같아. 이름을 기억나지 않지만 명창의 LP판이 여러 개 있었던 것 같아. 음악도 사랑하신 분이었네. 어릴 적에는 어른들은 다 그런가 보다 하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이었어.


 그리고 나에게 가장 강렬한 순간은 석굴암 여행을 갔을 때였어. 그 당시에는 석굴암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어. 우리 가족 옆에 외국인 관광객이 있었어. 외국인이 먼저 아빠에게 질문을 한 건지 아빠가 먼저 말을 건네본 건지 알 수는 없었어. 대화의 시작이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아빠가 석굴암에 대해 영어로 유창하게 외국인에게 설명을 해주셨어. 난 깜짝 놀랐어. 아빠가 어떻게 영어를 할 수 있지? 아빠는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아보지도 못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가 군대 시절 외국인과 지낼 기회가 있어서 배울 수 있었다고 하더라. 외국인과 함께 지낸다고 해서 모두 외국어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아빠가 그만큼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나 봐. 배우고자 하는 욕구도 많았었고.


아빠가 버스 운전을 하면서 수익금을 회사에 보내고 남은 몇백 원을 늘 가져와서 나에게 주셨잖아. 난 매일 밤 아빠가 주시는 100원, 200원이 너무 좋았어. 전날 밤 받은 몇 백 원을 가지고 매일 은행에 갔어. 저축을 한 거지. 그때는 은행 직원이 수기로 입금내역을 써준 것 같아. 매일 쌓이는 통장 내역을 보면서 난 정말 행복했어. 그때 학교에서 저축왕을 뽑았어. 학교 근처 은행에서 해당 학교 저축실적을 가져와서 상을 주는 거야. 난 내가 상을 받을 줄 알았어. 그런데 동네에 정육점집 딸이 상을 받더라. 부모님이 주신 용돈이 꽤나 돼서 내 저축액보다 많았나 봐. 


딸 : "아빠, 나 속상해. 저축왕 받은 애는 잘 사니깐 부모님한테 용돈을 많이 받을 거잖아. 나도 열심히 저축했는         데...."

아빠 : " 네가 더 훌륭한 거야. 넌 작은 돈이라도 매일 저금했잖아. 그게 더 중요한 거야!"

아빠가 해준 이 말을 듣고 비록 상은 받지 못했지만 내가 자랑스러웠어.


엄마, 이런 추억이 망울망울 내 머릿속에 떠도네.





처음 해보는 말이지만 난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맘이 더 편했어. 비록 아빠 역할이 컸지만 아빠가 없는 우리 집은 늘 평온하게 느껴졌어. 적어도 나에게 다가오는 분위기는 그래. 난 막내였고 학생이라 공부만 하고 딴 가족들을 살필 여유는 없었어. 학교 끝나고 오면 엄마가 퇴근을 안 해서 좀 쓸쓸하긴 했지만 조용하고 별다른 이슈가 없는 공간이 좋았어. 언제 집에 돌아와도 항상 같은 안정감을 주었지. 아빠가 없는 시간과 공간은 나에게 별다른 불편함과 슬픔이 남아있질 않았지. 다른 가족들이 날 충분히 지켜주고 있었으니깐.


그런데 엄마에게는 달랐겠구나. 남편이란 존재였으니까. 남편과 아빠는 다른 거지. 그래도 엄마를 지켜줄 수 있는 큰 산이었을 거야. 아빠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계셔서 그동안 내 안에 묵혀놓은 원망을 털어놓았다면 어땠을까. 아빠에 대한 기억이 좋은 것도 분명히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나쁜 것들이 더 강하게 머리에 남아있어. 공포심이 아직도 나를 가끔 짓누르기도 해. 이 걸 털어버려야 할 텐데 어쩌지? 


글로나마 쏟아내면서 아빠를 용서하고 싶어. 아빠가 가엾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해. 자신의 능력을 펼칠 여유도 없이 늘 자격지심 속에 살았을 아빠 인생도 너무 고달팠을 거야. 뛰쳐 나가서 더 큰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던 아빠였단 걸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아.


내 남편이 아빠랑 코드가 잘 맞는 스타일이야. 서로 죽이 맞아 잘 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사위를 많이 예뻐해 주시고 술도 마시고 골프란 것도 배우신다면 남편이랑 자주 놀러 다녔을 것도 같아. 그렇지 엄마?


엄마는 아빠를 얼마나 이해하면 살았어? 아빠가 아무리 속상하게 해도 자식들 앞에서 아빠 흉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 난 그런 엄마가 늘 대단하게 느껴지기만 했어. 어쩜 엄마는 아빠 내면의 모습까지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옆에 있어줄 수 있었던 걸까? 엄마랑 아빠에게 모두 묻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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