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입이 가벼운 남자

by 콩새와 밤톨

자고로 사람은 입이 무거워야 해.

특히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진중하고 점잖아 보이잖아.

말이 많으면 사람이 가벼워 보이고 자칫하면 실수도 하게 된다고.

과묵한 오빠들 틈에서 자라 나는 말이 별로 없잖어.

그런데 말 많은 이 남자와 30년을 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점점 말 많은 사람이 되어가지 뭐니.

좋은 점이나 닮아갈 일이지 참 나...


우리 집 남자 별명은 방송국이야.

이 남자 형이란 작자의 별명은 떠벌이지.

별명만 들어도 대충 그림이 나오지?

두 남자가 통화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본드를 입에 붙여버리고 싶다니까.

아무 쓰잘데기없는 이야기로도 한 시간을 떠들어대는 남자들 수다에 토가 나올 지경이야.

우리 집 남자의 가벼운 입은 우리 가정사를 퍼뜨리는 주범이기도 해.

우리집 대부분의 일을 친정이모들에게 전하는 일도 이 남자의 주둥이야.

주책도 가지 가지지?

어떤 남자가 처 이모들한테 날마다 전화를 하냐.

야!

니 남편이 그러면 넌 좋겠냐?

뭐라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도 마라.

자기 집안 사돈에 팔촌까지의 소식도 나한테 말한다니까.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들어야 한다구.

이 남자의 가벼운 입은 통제 불능이야.


우리 오빠들이 이 남자의 가벼움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니.

내가 이 남자와 결혼하기 전부터 아주 못마땅해했어.


우리 큰애 태어났을 때

막내오빠가 1년 정도 우리집에 얹혀 살았잖아.

그나마 막내오빠는 이 남자의 가벼움을 자상한 성격으로 받아줬지.


우리 애들이 대여섯 살 됐을 때 둘째 오빠가 이혼을 했잖냐.

그때 잠깐만 우리 집에 있는다는 게 6개월이나 같이 지냈다니까.

둘째 오빠가 이 남자를 제일 미워 했어.

말도 너무 많고 아주 특이한 사람이라고 싫어라했지.

오빠가 그때 이 남자를 그나마 덜 미워한 것 같아.

아마도 본인이 결혼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남자 볼 면목이 없었을 거야.


우리 애들 초등학생 때는 친정아버지랑 6개월을 같이 살았잖아.

이 남자가 휴일마다 장인이랑 목욕탕도 가고 산에도 가고 시장도 가더라.

장인한테 뭔놈의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찰싹 달라붙어 쫑알대면서 아버지를 챙기더라고.

난 울아버지라도 같이 사는 거 진짜 힘들었거든.


작년여름에 우리엄마가 아파서 우리 집에 오신거 알지?

이 남자가 장모를 모시고 바람도 쐬러 가고 병원에도 다니면서 마치 자기 어머니 모시듯 했어.

원래 이 남자는 장모랑 수다로 날밤새는 사람이잖아.

울엄마 서울에서 혼자 살 때도 이 남자가 하루에 세 번씩 꼭 전화했다니까.

어떤 사위가 장모한테 그런다니, 아들들도 안하는데.

올봄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엄마한테 참 잘 했어.

그걸 생각하면 진짜 고맙긴 하지.


엄마가 우리 집에 계실 때 오빠들이 자주 왔었어.

올 때마다 특히, 둘째 오빠가 대놓고 이 남자를 구박했어.

이 남자는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평소보다 두세 배는 더 말이 많아져.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자기 말만 하잖아.

그러니 오빠들 눈에 얼마나 못마땅했겠어.


어느 날은 재활용함에서 주워온 옷을 자랑삼아 오빠들한테 말했다가 된통 당했다니까.

이 남자가 구멍 난 곳에 테이프를 붙여서 입었잖아.

그것도 두 군데나 말이야.

차라리 아무말도 하지말지.

내가 미쳐 진짜.

무슨 궁상이니.


나도 이 남자 말 많은 거 아주 싫거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이 남자, 나한테 구박받을 때와 친정오빠들한테 구박받을 때 모습이 다르더라.

나한테는 당당하게 맞받아치는데 오빠들 앞에서는 기를 못 펴는 이 남자가 고소하면서도 묘하게 짠하더구만.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올 때마다 이 남자를 구박하는 오빠들이 영 못마땅하면서 슬금슬금 화가 나더라고.

그래서 오빠들하고 한바탕 했잖아.

오빠들이 결국 이 남자한테 사과하긴 했어.

그래도 이 남자가 울 엄마를 마지막에 모신 사람이잖아.

참... 부부란 것이 뭔지, 그쟈?


친구와 긴 통화를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속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이혼하자, 이혼해!

-장모님도 이제 가고 없는데 이혼하자!

엄마가 돌아가신지 한 달만에 이 남자가 나한테 한 말이다.

싸운이유는 기억에도 없고 이 말만 가슴에 몽우리가 되었다.


이 남자의 가벼운 입이 무거울 때가 있다.

아무리 크게 부부싸움을 해도 하지 않는 이야기.

내 심장을 들쑤시는 험한 말을 하면서도 안 하는 이야기.

처가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힘들었을 이야기.

얼마든지 큰소리치며 생색낼 수 있는 이야기.

처남들의 구박에 수치스러웠을 이야기.

아무리 화가 나도 하지 않는다.

나 같으면 퍼부었을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남자의 주머니를 본격적으로 뒤지게 된 것은 10년 정도 된 것 같다.

아이들이 군대에 가고부터 이 남자가 딴 주머니를 차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도 천 원짜리 몇 장만 꺼냈는데 도둑질도 느는지 하다 보니 점점 간이 커진다.

오천 원을 꺼내가도 이 남자가 모른다.

급기야 만 원짜리에 손을 댔다.

그래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십 년 가까이 비밀스러운 도둑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친구에게 나의 도둑질을 말하고 있는데 화장실을 다녀오던 이 남자가 쑥 끼어들면서

-아이고, 내가 모른 줄 알았냐?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바보냐, 그걸 모르게!

세상에, 세상에나!

가벼운 이 남자가 어찌 참았을꼬?

말하고 싶어서 어찌 그 긴 세월 참았을꼬?

한두 해도 아니고 자그마치 십 년이다.

입이 근질거려 어찌 참았을꼬?

옆에서 배꼽 잡는 친구 왈

-푼돈을 슬금슬금 도둑질한 마누라 귀여웠나 보다. 알고도 눈감아주고 니 남편 진국이다야!

와, 와...

그날 나는 가벼운 내입을 다물지 못했다.

엉큼하기 짝이 없는 이 남자의 무거운 입.

지금 나는 그 남자의 주머니를 대놓고 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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