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워도 희망, 추워도 희망, 궁색해도 희망

여덟 번째 이야기(2017~2018)

by 세라

#8-1. 이사와 희망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누구나 더 나은 집을 찾기 위해 애쓰기 마련이다. 10년 넘게 고시원 셋방을 전전하며 살아온 나에게도 방을 고르는 일에는 결코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차악'을 고르는 일에 더 가까웠을 테지만, 그래도 그건 희망이었다.


그러니 그 어떤 가난도 삶의 시작을 초라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2017년 늦여름도 그랬다. 하숙집에서 또다른 하숙집으로 이사를 하며 친구 셋을 불러다 노동을 품앗이하고 주머니를 탈탈 털어 밥과 술을 배불리 먹였다. 통장은 금세 허룩해졌지만 마음만은 그 장맛비처럼 시원하고 충만했다. 희망은 그런 식으로 생겨났다. '이사'라는 말은 '희망'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아닐까?



#8-2. 여름 자선 아이스팩


그 여름, 정말, 더워서 죽을 뻔 했다. 여섯 가구가 붙어 살던 하숙집에는 복도에 에어컨이 딱 하나 있었다. 더위는 가혹하리만큼 지독해서 샤워를 해도 물줄기가 그치자마자 바로 땀이 났고 밤에는 맥주 중독의 길로 쩌들어 갔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더욱 견딜 수 없어 땅바닥의 냉기라도 묻히기 위해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문쪽으로, 문턱 바로 앞으로, 에어컨 쪽으로, 스멀스멀 가까워졌다. 나는 생명의 공기 같은 가느다란 에어컨 바람을 허덕허덕 받아 마셨다.


하숙집 사람들은 슬슬 방문을 열고 에어컨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마치 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처럼 본능적인 행동이었으리라. 복도를 지나갈 때면 방문 커튼 아래로 사람들의 머리가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나는 여섯 개의 방 중에 에어컨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치였다. 그래도 숨이 칵칵 막혔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런 주제에 2등이라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건가 걱정했다. (참 나.)


에어컨은 항상 밤 12시 조금 넘어 시작해 새벽 5시쯤 꺼졌다. 집주인은 등대지기처럼 그 시간마다 규칙적으로 와서 에어컨을 켜고 껐다. 참다못해 직접 조작해보려고도 했지만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켜지지 않았다. 집주인만 인식하는 똑똑하고 치사한 에어컨이었다.


밤마다 잠 못 자고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출근 버스를 타면, 버스 안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은 참으로 꿈결 같았다. 같이 일하는 선배들은 아침마다 다크 포스로 나타나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었다. 하숙방이라 살림살이를 하지 않아 아이스팩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한동안 내 자리에 자선 아이스팩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감동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꿈결 같은 에어컨 바람이 흐르는 출근 버스, 2018년 7월



#8-3. 겨울은 겨울대로


선배들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여름만이 아니었다. 겨울이면 심심찮게 수도가 동파되었고, 모자를 눌러쓰고 거지 같은 꼴로 출근해서 양해를 구하고 목욕탕에 다녀오기도 했다. 다행히 회사 분위기가 나름 유연한 편이었고, 팀장님은 끌끌 웃으며 목욕탕에 다녀오라고 했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감사해요. 꾸벅.


2018년 1월



#8-4. 벚나무 하숙집


하숙집에서 스무 걸음쯤 되는 곳에 벚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자동차들의 틈바구니 속에 어울리지 않게 서 있는 외로운 도시 벚나무는 왠지 내 이목을 끌었다. 나는 그 나무와 친구가 되기로 했다.


나는 매일 하숙집을 오가며 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히고, 만개하고, 태풍에 흔들리고, 꺾이는 모습들을 지켜봤다. 다른 벚나무보다 훨씬 늦게 꽃이 피더니 일주일도 채 살지 못하고 고개가 꺾이는 모습은 참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돌봐주지도 않았고 돌봐줄 의무도 없었던 그 나무에게 왜 그렇게 애착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세상에서 벚나무의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시인이라도 된 양 그해 봄여름을 힘껏 껴안았다.


2018.4.22


어떤 물건이나 존재로 한 철을 기억하고 소환할 수 있다면 적어도 나무처럼 친구 삼을 수 있는 것이었으면 한다. 꽃과 나무가 없는 집에서도 나는 잘 살아갈 테지만, 친구라는 건 존제 자체만으로 세상을 등지지 않게, 심지어 세상을 아끼게끔까지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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