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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Feb 04. 2024

Starry Starry Day

햇빛이 난다. 각막이 시리다. 세상이 렁, 울렁, 유화처럼 밝아지고, 사물의 외곽이 모습을 드러낸다. Starry Starry Day. 오전의 조도에 몽롱해진 채 골목길을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학습되지 않는 길들. 각각은 아는 길인데, 길들이 서로 어떻게 조립되어 있는 건지는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다. 분명 어딘가에 닻을 던져 놓고 걷는데, 세 블록 정도만 꺾으면 방향 감각이 통째로 헝클어진다. 고독은 내 왼쪽에 있는가, 오른쪽에 있는가. 고독의 날개를 펼쳐, 올라, 나의 좌표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는 한낱 길치이자 고독치였다. 걷는다는 게 일루전에 가깝다. 다만 걸을 뿐. 어쩌다 걸음이 닿은 곳들은 전부 휴무였다. 오늘 무슨 요일이지? 말을 하면 목소리가 나올까? 나 취했니. 아니, 너 덜 취했니. 걷는 게 왜 그 따위니.


어느 날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나를 보니 얼굴에 우울과 피폐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이제 아무리 웃어 보아도 가려지지 않는, 길치이자 고독치이자 웃음치의 흔적이. 놀랍게도 나는 변이된 것이 아니었다. 외려 원형原形이었다. 그것은 원시부터 내가 나에게 세세년년 물려준, 순도 높은 역사 자체였다.


대로는 침울한 술 주정뱅이로 삶 어드메 처박힐 것만 같았다. 하여 밤을 새우고 오전에 나와 목적 없이 걸었다. 걷다가 시계를 볼 때마다 1분 혹은 2분이 흘러가 있었다. 미래가 자우룩하다. 더디 흘러가는 이 세계는 무엇인고. 아직 12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 햇빛이 드는 10시 혹은 11시가 있다는 사실이 거의 기만적이다. 늘은 시푸르렀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지금 내가 보이냐묻,지는 않았다. 내 조음 기관이 제대로 작동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태초의 인간들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그때 불쑥, 나와 똑같이 생긴 행인이 나타나 무어라 대답했고, 나는 그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 대화는 한 편의 온전한 시였다. 그러나 메모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기억할 수 없다. 메모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으리란 걸 리얼-타임으로 알았지만, 그것이 나에게서 그대로 떠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해답처럼 속삭이는 것들에게 이미 여러 번 실망했거든.


계절의 좌표는 바야흐로 2024년 2이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다. 기온이 많이 올랐다. 밤에 을 쓸 때마다 겨울이 막 도착한 것처럼 굴고 있었는데, 세상에 나와 보니 겨울 용품은 처분 대상이다. 러므로 겨우내 망설였던 글들도 처분 대상이다. For Sale.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나는 아무에게도 성냥을 팔지 못했고, 성냥불은  번도 켜진 적 없었으므로 질 수도 없 것이었다. 이대로 봄이 오는가. 시야에 많은 가게들이 스쳐 갔다. 꽃집, 네일숍, 밥집, 빵집, 피아노 학원 유리창 너머로 제 갈 길을 알고 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이 모두 Starry Starry 보였다. 나는 유리창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오직 아는 길만을 헤매고 있으니, 어딘가를 벗어나지는 못한 다. 새로운 건 없었다. 무엇을 더 메모할 텐가.


한참 동안 거리를 배회하다가 카페에 들어갔다. 나는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간 첫 손님이었고, 카페에는 한동안 나 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음악이 사물들 사이를 안개처럼 흘러 다녔다. 이건 음악인 척하는 물이네. 저건 낮인 척하는 밤이고. 나는 첫 손님이 아니라, 우두커니 앉아 있는 마지막 손님 같았다. 그래서 마음껏 울어도 되는 것처럼. 카페 주인이 화분에게 물을 줄 때 문득, 햇살이 모든 방향으로 쏟아졌다. 세상이 두어 번 울렁거렸고, 사물의 외곽이 밤처럼 흐려졌다. 보이나요, 내가 보이나요, 나 이런 글을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나는 무슨 글을 쓸지 알고 쓰는 사람이 아니다. 쓰고자 하는 것은 결국 써지지 않는다. 시의 파편들이 허랑허랑 떠돌았다. 루이즈 글릭, 파블로 네루다, 빈센트 레이, 마르그리트 뒤라스…… 읽는 순간 리얼-타임으로 잃어버린, 잃어버릴 것을 알고도 읽은, 그러므로 기억할 수 없는.


이윽고 석상처럼 졸았다. 얼음 호수에 갈 걸 그랬나. 그런데 얼음 호수마저 깨어나 있으면 어떡해. 산으로 갈 걸 그랬나. 그래 봤자 산인데. 강으로 갈 걸 그랬나. 그래 봤자 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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