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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Feb 14. 2024

내려놓아라. 지고 가거라.

이따금 사물들만이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는 나의 독방에서, 오후에 문득 몸을 일으켜 방 한 구석에 대충 뭉쳐 두었던 이불 더미를 정리했다. 어떤 결심 같은 것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오래 미뤄 왔던 것을 그냥 툭, 하게 될 때, 그런 것도 생의(意)라면 생의일까. 손님들이 간 뒤에 조개 무덤처럼 쌓아두어 늘 동선에 걸리적거렸는데도 불편한 채로 몇 달을 살았다. 그리 살다 보니 불편한 것도 잊어버렸다. 거리낄 것이 많은 마음의 방은 아마도 이런 모습 아닐까.


방바닥을 닦고, 책상과 물건에 쌓인 먼지를 닦고, 가스레인지를 닦고, 과탄산소다로 컵에 착색된 커피 얼룩을 지우고, 진해져 가던 화장실의 물때를 지우고, 술병을 버리고, 곳간을 털어 밀린 관리비와 건강보험료와 가스비와 폰 요금과 학자금 이자를 납부하고, 쌓아놓은 책을 치우고, 곧 쓰러질 듯 기울어져 가던 스탠드 조명의 나사를 조였다.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몇 번인가 팔려다 참은, 시계를 보았다. 정작 시간은 십 분 단위로만 확인할 수 있어서 반쯤은 인테리어용인 시계. 한 신랄한 친구는 쓸데없는 물건이라 일축했지만(동의한다), 나는 시계의 공적인 역할에는 다소 느슨한 이 시계를 좋아한다. 그 정도의 시간만 확인해도 충분한 날들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모르기 위해서이며, 궁극적으로는 시간에 대한 인식 자체를 망각하기 위함이다. 시계종 전체에 대한 귀여운 반항아가, 여기 미련 많은 백수네 집에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봐줄 만한 이런 억지와 고집조차도 곧 중고 시장에 내어 놔야 할 것 같으다.)


가끔 z축이 뒤집힌 시계를 갖고 싶단 생각도 한다. 그러니까, 벽의 시점에서 본 시계. 시계 바늘이 반대로 흘러가는 풍경도 한 번쯤 내 곁에 들여놓고 싶다. 그런 사물이 책상 가까이 있다면, 내 글은 어떻게 달라질까? 내가 불안해할 때마다 조급해하지 라, 반대로 돌아가라, 자상한 어투로 말해줄 것만 같다. 아직까지는 그런 시계를 발견하지 못했다. 중요한 건 시계가 아니라 대답을 갈구하는 내 마음이겠으며 빈 책상만으로도 여백을 머금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가장 좋겠다마는, 나는 언제나 좀 미욱하고 너저분한 사람이라 이렇게 책상 주변에 조개 껍질이나 말린 나뭇잎 같은 것들을 조촘조촘 올려두고 그것들이 내 글 속에 꽃물처럼 스며들기를 바라곤 한다.


청소를 하다 보니 다시는 보기 싫은, 누군가의 흔적들도 보였다. 한때 내가 안전장치도 없이 마음을 기울였던, 마음이라 믿었는데 마음이 아니었던 것들. 누군가에게 잠시 곁을 빌렸던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던 수많은 날들에서 내가 배운 것은 고작 인간 불신이었고, 강박적인 환멸이었고, 끝이 없는 울화였다. 닦고 치우고 버리며 이제는 서러움도 잊거라, 하고 가이 없이 되뇌어 보았으나 그럼에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이 아니었다고 결론 내린 것들도 실은 마음이었다고…… 언젠가 쓸 수 있을까. 그래, 어디 쉽나, 그게. 오늘은 여기까지만 치우자. 미간의 을 풀었다. 햇살이 한 줄기도 비치지 않날이었는데도 잠시 마음이 시큰했다. 한순간의 깨달음이 다는 아닌 거라,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버려야 할 것도 생각하고, 가지고 싶은 것도 생각하고, 다 버리지 못한 것도 생각하다가, 청소를 마무리하고 커피를 한 잔 타 와서 책을 펼쳤다. 그런데 마치 내 일상을 들킨 마냥, 곧장 이런 문장을 만났다.


조주 선사에게 엄양 존자가 물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려놓아라.(放下著)"
"이미 한 물건도 갖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그러면 짊어지고 가거라.(着得去)"

엄양 존자는 크게 깨달았다.


'방하착(放下著)'과 '착득거(着得去)'라는 불교 용어에 대한 이야기다. 방하착은 번뇌와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뜻이며, 그의 역화두인 착득거는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 자체도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은 그냥 지니고 가라는 말이나, 그것은 내려놓으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내려놓는 것도 내려놓는 것이고, 지고 가는 것도 내려놓는 것이다. 또한 다 내려놓았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도 되겠다.  내려놓았다는 바로 그 생각도 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페이지를 더 넘기지 못하고 앉아서 이 선문답을  번 베껴 썼다.


내려놓아라.

지고 가거라.


다 치우지 못한 내 마음도 거기 행간에다 잠시 내려놓았다. 그러다 보면 더 치워야겠다는 생각도 잊어버리게 되겠거니.


아무려나 일어 방을 치운 것은 오늘의 최대치 생의였으므로,


오후에 커피가 달았다.



2024년 2월 1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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