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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an 30. 2024

낭만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나의 지방 친구들은 언제나 대도시의 그악스러운 야경에 감탄을 내뱉곤 한다. 시컴한 밤에 빛나는 충혈된 눈동자, 퀭한 야근의 불빛이 너희들은 글쎄…… 보이지 않는구나. 얘네들은 자꾸 서울에는 그 어디에도 없는 '낭만'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애처럼 유치하게 고개를 빽 돌렸다. "그래, 너네나 실컷 봐라! 나는 쳐다보기도 싫다!" 그 우아하신 낭만에 새똥이나 팍팍 떨어지기를, 몰래 기도하면서.


기대했던 새똥은 내 옥탑방 빨래 위에나 함빡 떨어졌고……

(고오맙습니다)


도시의 낭만 건재하다. 내가 하느님도 부처님도, 차라투스트라도 믿지 않아서인가? 치사하긴.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철마다 돌아오는 이사 걱정을 앓으며, 갭 투자자인 집주인의 냉장고에다 덕지덕지 붙여 놓은 쪽지들을 바라본다. 나의 작고 짓궂은 팅커벨들이다. 내가 먹고 싶다, 하면 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 먹고 싶다, 라는 문장이 튀어나와 나와 함께 종알거려 준다. 내가 울고 싶다, 하면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는 문장이 팔을 쑤욱 내민다. 내가 못 잊겠다, 하면 할 일 없으니까 자꾸 가서 디다보구 파보구 하니 뿌렝이가 썩는겨, 하고, 누군가 대야만큼 큼지막한 마음을 내준다. 밥 고민, 집 고민, 살아남는 고민어찌 조각으로 가려지랴마는,


고마웠어, 나의 팅커벨


난 돌아오지 못할 거야


여긴 너무 머니까


작별을 고하자 냉장고와 나는 갈라지며, 서서히 멀어진다. 대륙이 이동하고 지형이 변화한다. 시와 나 사이에 태초의 균열이 생긴다. 반대편의 시차가, 그렇게 생긴다. 고요한 새벽의 비밀 사건. 인간들은 알 수 없는 지구적 사건. 우리의 해안선은 영원히 일치할 거야. 우린 화석이 되어서도 만나지 못할 거야. 우리는 매일 밤 이 집을 버릴 거야. 할 수 있지?


나는 거리에 내몰린 빈궁한 마음으로 냉장고 앞에 우둔한 막대기처럼 서 있었다. 한참 동안.


……얘들아, 봐라, 이래도 서울살이가 낭만적이냐, 이 독한 지지배들아,


아침 8시쯤인가, 대로변에서 일상적으로 왱왱거리는 구급차 소리에 일상적으로 몸서리치며 귀를 틀어막다가 지쳐 잠들었다.




<황금빛 모서리> 김중식


뼛속을 긁어낸 의지의 代價(대가)로

석양 무렵 황금빛 모서리를 갖는 새는

몸을 솟구칠 때마다

금부스러기를 지상에 떨어뜨린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먼 곳까지 갔다가

석양의 黑點(흑점)에서 클로즈업으로 날아온 새가

기진맥진

빈 몸의 무게조차 가누지 못해도


아직 떠나지 않은 새의

彼岸(피안)을 노려보는 눈에는

발 밑의 벌레를 놓치는 遠視(원시)의 배고픔쯤

헛것이 보여도

현란한 飛翔(비상)만 보인다




늦은 오후, 해장 라면을 끓이기도 전에 석양 속에서 마수걸이를 하듯 시를 읽었다. 상상해 보았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제 뼈의 금부스러기를 다 떨어뜨리며 태양의 흑점까지 날아갔다가, 기진맥진 푸드덕거리며 추락하는 새를. 그러나 내 마음에 스키드 마크를 남긴 단어는 '피안을 노려보는 눈'이었다. 그러니까, '노려보는'. 배고픔쯤 헛것이 되어도, 비상을 꾀하는. 노려보는!


나는 또다시, 비통과 욕망이 뒤엉킨 '먹고 싶음'으로 냉장고 앞에 마주 섰다. 시여, 나는 또 텅 비었습니다. 시여, 내 배고픔은 헛것입니까. 시여, 나는 왜 시가 되지 못했습니까. 원통하나이다. 분통이 터지나이다.


겨울 저녁, 첫 끼의 설거지를 마치기도 전에 세상의 황금빛 모서리는 연해졌고, 나는 밖으로 나가 아무렇게나 걸었다. 그러다 건물 틈에 걸친 북한산 한 자락을, 그곳에 고이는 마지막 금부스러기를, 아스팔트 도로 한복판에 서서 끝까지 바라봤다. 눈 몇 번 깜빡할 사이에 버드 아이 뷰 앵글(bird eye view angle)로 사라지는 들. 멀어지는 나의 팅커벨들. 그러나 나, 울지 않았어라. 세상이 내 몫으로 남겨둔 슬픔,에 왠지 화가 났으니까. 내 눈동자에 어룽거리던 것도, 내 것도 금빛이었으니까.


할 수 있지?


해가 완전히 진 뒤 빛나는 창문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아니, 노려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카페에 가서 이력서를 썼다..... 백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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