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 Dec 01. 2023

하루를 살았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가

겨울옷이 커진 것 같다. 내가 늙은 건지, 옷이 자란 건지. 몇 해 정도 대충 걸렀었나? 기억이 나지 않네. 옷은 무얼 먹고 자랐나. 술이 밥이 되는 동안 내가 잃어버린 건. 하루를 살았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거울 속 저 얼굴, 너는 누구냐!


썩 꺼져라.


어떤 옷도 내 영혼을 보호해주지 못하리라는 생각 속에서, 대문 밖으로 나섰다. 찬바람이 불 때마다 뺨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자학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그래요, 여기서 이만 멈출까요. 저는 충분히 온 것 같아요…….


바람의 재촉.


약속장소까지 걸어갔다. 오랜만에 친한 후배를 만났다. "누나, 왜 이렇게 해골이 돼버렸노!" 대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그 애도 20대 초반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마른 디포리 같이 곯은 몸으로 공사판에서 노가다 알바를 뛰고, 막막한 도시를 무진무진 걸어 다니더만, 이제는 대기업 7년 차에 번듯하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까지 두둑이 올라서 내 앞에서 이리 큰탈 없이 잘 살고 있다 말하니, 보기에 그지없었다. 겨우 1살 차이인데, 장하고 훌륭했다. 후배가 밥을 샀다. 착한 녀석. 네 딸도 너처럼 착한 사람으로 자라라.


고독과 피로.


어떤 날에는 예전에 다녔던 신문사의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40대 초반의 여자 피디다. 신문사가 어려워져서 50세 이상은 희망퇴직을 받는 분위기라 했다.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 "선배, 50세는 그럴 나이가 아니지 않아요? 글이 가장 원숙하고, 모든 게 노련하고, 업계 인맥이 풍성한 시기 아닌가요?" 선배는 오히려 내 반응이 너그럽다고 했다. 회사의 젊은 여론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타성에 젖은 게으른 늙다리들은 안 그래도 쩍 쪼그라든 회사의 금고나 축내는 타도의 대상이라는 것이 2030의 주된 목소리란다. 아니, 어째서…… 나는 이모삼촌처럼, 때로 은사처럼,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4050 선배들을 떠올리다가, 한편 세상에서 저만 잘나고 인정머리 없고 꼴사납게 정치쇼 는,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약자를 위하는 정의로운 기자! 라는 선배들도 떠올렸다. 후자를 떠올리자마자 시소의 무게가 한쪽으로 급하게 쏠렸다. 


쾅. 


단지 나가서 저녁 식사만 하고 들어와도 체력이 동난다. 한 줄의 시조차 소화시키지 못하고 바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선배와 후배에게 밥이나 얻어먹고 잠이나 자는, 아니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이 염치없는 백수 무지렁이여. 아아, 더 이상 세상 일에 참견 말자. 바람의 일에 간섭 말자. 내일이여,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게. 여기서 줄이 끊겼다네. 자네 바로 앞에서 모든 게 동나버렸다고. 이제 없어. 정말이야.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게 좋겠네. 오래 기다렸나? 쯧, 딱한 양반.


예, 오래 기다렸지만 진상 안 떨고  물러갑니다요. 안녕히 계시오, 오늘 선생.


솔잎만 같던 내일이 떠나자 뼈마디가 끽끽거렸다. 근육이 뻐근해졌다. 피부가 거칠어졌다. 굶주린 영혼이여, 황무지 속에서도 사랑을 갈구하느냐. 무슨 사랑? 겨울 사랑. 그래, 따뜻한 것.


목욕탕에 갔다. 44kg였다. 조금 빠지긴 했다. 그래도 해골까지는 아닌데 허풍은. 옆자리 할머니가 자꾸 나를 힐끔거렸다. 잠시 후에 캔커피를 내밀며 말을 건다. "이거 입 안 대고 마셨는데 좀 남았는데 먹을래?" 나는 바로 거절했다. 좀 깍쟁이 같았나? 그래도 별로 안 먹고 싶었다. 뜨거운 탕 안에 들어가 볼품없는 살과 뼈를 푹 눙쳤다. 따뜻해져라,


살과 뼈.


돈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는 친구를 생각했다. 친구에게 쌀을 좀 가져다줘야겠다. 얼마 전 쌀 10kg를 선물 받은 적 있어서 나는 지금 쌀 부자다. 그리고 견과류도 좀 가져다줘야겠다. 대용량 견과류를 선물 받은 적 있어서 나는 지금 견과류 부자다. 그리고 또…… 시를 줄까, 시는 친구의 살과 뼈가 될 것인가,


등 좀 밀어줄까?


또 옆자리 할머니다. 음, 2023년에 서울에서 이런 흐무진 풍경이라니, 내가 그 풍경 속의 주인공이라니. 할머니가 등을 밀어주면서 진짜 할머니 같은 말을 한다. "어유, 밥 좀 먹어, 밥 좀! 살이 있어야 힘이 생겨. 안 그러면 힘을 못 써." 낯선 사람 앞에서 으레 쉽게 고장 나는 나는, 이내 잡스러운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제가 얼마 전에 감기에 걸려가지고요……" 할머니들은 역시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감기 걸려서 1kg 빠졌냐?" 대관절 나는 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것도 나신으로 앉아, 혼나고 있는 건가. 할머니는 나보다 훨씬 힘이 셌다.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살과 뼈.


나도 2050년쯤에 할머니가 되어서 홀로 앉은 누군가의 등을 밀어줄 수 있을까. 저렇게 힘차게. 저렇게 쓸모 있게. 목욕탕에서 나와서 대파와 김과 보리차를 샀다. 집에 와서 만둣국을 끓였다. 거울 속의 그 애를 불러 낸다. 할머니가 밥 먹으래. 이리 와, 같이 먹자.


부걱부걱. 달그락달그락. 후추 톡.

이전 07화 시계, 나의 시계(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